이용악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공산(空山) 2015. 11. 25. 12:42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고 없었고,
   아무을만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는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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