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윤이산
당신을 읽다가
한쪽 귀퉁이를 접어둔다
나를 당신에게 걸쳐둔 채
외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돌아와 또 꿈을 꾸면서
접어 둔 쪽을 펼쳐
다시 읽는다
읽다가 접어두는 페이지는
점점 늘어나고
당신은 내게 너무 아늑하고
나는 당신을 해독하는데 턱없이 서툴고
우리는 아직 그런 관계인 걸까
그렇다 치고,
여하간 나는
오늘도 당신의 한 귀퉁이에
붉은 밑줄을 긋는다
남겨 둔 표식은
꽃 피울 자리를 매만져두는 일
가끔 당신을 덜어다 쓰기도 하는데
당신이 나를 얼마나 깊이 물들여놓았는지
내가 당신 행세를 할 때가 있다
나무도 간절히 가려운 자리에 움을 틔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늘 한 발 늦는,
도착하면 파장罷場만 남아있는,
내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무모라고
매몰차게 당신을 닫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나를 걸쳐두기로 한다
당신이 점점 내게로 옮겨와 무럽도록
마음이 가려워져서 당신이 내게 왈칵, 쏟아질지
생각이 간절하다면
어찌 꽃이 멀게 있겠는가*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 “仁遠乎哉? 我欲仁 , 斯仁至矣. 인仁이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원하면, 인이 바로 이를 것이다.” 논어 술이편 29장 변용.
―『사이펀』202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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