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 윤이산

공산(空山) 2022. 4. 5. 21:25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윤이산

 

 

   당신을 읽다가

   한쪽 귀퉁이를 접어둔다

 

   나를 당신에게 걸쳐둔 채

 

   외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돌아와 또 꿈을 꾸면서

 

   접어 둔 쪽을 펼쳐

   다시 읽는다

 

   읽다가 접어두는 페이지는

   점점 늘어나고

 

   당신은 내게 너무 아늑하고

   나는 당신을 해독하는데 턱없이 서툴고

   우리는 아직 그런 관계인 걸까

   그렇다 치고,

 

   여하간 나는

   오늘도 당신의 한 귀퉁이에

   붉은 밑줄을 긋는다

 

   남겨 둔 표식은

   꽃 피울 자리를 매만져두는 일

 

   가끔 당신을 덜어다 쓰기도 하는데

   당신이 나를 얼마나 깊이 물들여놓았는지

   내가 당신 행세를 할 때가 있다

 

   나무도 간절히 가려운 자리에 움을 틔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늘 한 발 늦는,

   도착하면 파장罷場만 남아있는,

   내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무모라고

   매몰차게 당신을 닫아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나를 걸쳐두기로 한다

 

   당신이 점점 내게로 옮겨와 무럽도록

   마음이 가려워져서 당신이 내게 왈칵, 쏟아질지

 

   생각이 간절하다면

   어찌 꽃이 멀게 있겠는가*

 

   오랜 후에,

   영영 오랜 후에라도

 

 

   * “仁遠乎哉? 我欲仁 , 斯仁至矣. 이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원하면, 인이 바로 이를 것이다.” 논어 술이편 29장 변용.

 

   ―『사이펀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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