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는 아름다움과 형식 없는 평화의 시학
― 김종삼론
이민호
1. 서 론
문학은 충만을 꿈꾸지 않는다. 문학의 상상력은 결핍 이후에야 비로소 날개짓을 한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분리된 지향이며, 가공의 실존적 투사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상상력은 흉포와 와전을 거치며 고통에 가득 찬 탄생을 보게 된다. 이러한 언급은 1950년대 전후 시인의 시세계를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특히 고통스런 한국의 현대사를 힘겹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의 시세계를 탐구하는 상상력의 근거로 삼을 만 하다. 김종삼 시인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삶의 진리를 터득해 가는 도정에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인간성의 회복이다. 그의 시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가난과 인간적 모멸을 겪어야 했던 우리 자신에게 잃어버린 모든 아름다움에 시선을 고정하도록 이끌고 있다.
김종삼의 시에 등장하는 많은 예술가와 아이들이 그 아름다움의 전령들이다. 그들은 인간 삶의 미와 추, 순수와 불결, 영원과 순간의 대척점에서 전자의 모습으로 시세계를 대변한다. 또한 그들을 통해 김종삼 시인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 자리하고 있는 전쟁과 가난의 상처를 위로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 상상력과 낭만적 상상력 속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평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또한 김종삼의 시는 현실 세계가 배제된 내면 풍경에만 몰두하지도, 자아가 투영되지 않은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지도 않는 변증법적 지성의 측면에서 부정의 미학 그 자체이다. 그의 시는 자아와 세계와의 대립을 통해 동시대의 사상(事象)을 날카롭게 드러냄으로써 우리 심지(心池)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본고는 제한적으로 김종삼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아름다움’과 ‘평화’라는 특정 모티프에 초점을 맞추어 통시적 관점에서 그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김종삼 시에 대한 기존 논의는 다음과 같다.
김춘수는 김종삼의 존재론적 비애미를 언급하면서 하이데거의 시론을 수용한 시의 존재론적 의미를 근거로 김종삼의 시가 존재자로서의 무상성, 존재자의 근원적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한계전은 그것을 허무의 미학으로 비존재의 존재로 보고 있다. 이승훈(1979)은 김종삼 시의 시적 모티프를 분단의식에 두고, 미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이 변증법적 갈등과 긴장을 일으키며, 변화 발전한다고 보고 있다. 반경환은 현실적, 시대적 배경이 시인의 시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여 식민지 시대 김종삼의 생활이 초기, 중기 시의 폐허의식으로 나타나고, 후기시는 따뜻한 삶에 대한 희원과 생활현실로 하향 회귀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런 측면에서 최민성은 김종삼의 시를 방황의 정서로 김태상은 비극적 세계인식을 통해 고찰한다. 김시태는 김종삼의 방황을 순수의식의 발로로 파악한다. 또한 이승훈(1988)은 김종삼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이미지를 물과 돌로 보고, 물은 평화의 열망을, 돌은 죽음과 응결로 파악하여 김종삼의 영혼 지향성을 언급하고 있다.
김현은 김종삼의 중심 의식을 비극적인 세계 인식으로 파악 그러한 연유로 김종삼의 시가 세계와 비화해적인 불화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황동규는 인간의 부재의식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숭원(1993a)과 조남익은 이승훈의 논의에 회의적 시각을 갖고, 김종삼의 내면 풍경을 음악과 관련하여 고찰하고 있다. 김종삼 시의 중심 주제를 죽음의식에 두고 있는 연구자들은 김태민, 백인덕, 오형협, 이숭원(1993b), 장석주이다. 백인덕은 김종삼의 시적 변화를 죽음의식의 성장으로 장석주는 그의 죽음의식을 초월적 낭만주의로, 오형협은 비극적 낭만주의로 파악한다. 강석경과 윤병로는 전기적 생애와 관련하여 김종삼의 자유인 기질과 보헤미안 기질을 언급한다.
이러한 기존 논의를 통해 볼 때, 김종삼 시에 대한 연구는 공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주제적 측면에서 볼 때, 대다수의 논의가 중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면적 고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종삼의 시에 나타난 주제의식을 모더니즘 시의 보편성 안에서 예술지상주의적인 순수성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그 하나이며, 한국의 역사 사회적 상황의 특수성 안에 그의 시를 안치시키려는 경우가 그 다른 하나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도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이 둘을 통합한다 해도 김종삼의 시는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기존 논의가 간과한 점은 김종삼의 코스모폴리탄적 기질이다. 그것은 인류 보편주의적 개방성의 측면에서 폐쇄적인 보헤미안 기질과는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종삼 시인은 세계인으로서 보편성을 갖고 있고 한국인으로서 특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시에 수없이 등장하는 이국적 이름과 풍경이 이해될 수 있으며, 왜 그가 어린이에게 그토록 무거운 시적 섬광(閃光)을 쏟아내는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김종삼의 시는 통시적 접근이 어려워 보인다. 초기시와 말년의 시 모두에서 기존논의에서 언급한 이미지와 모티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종삼 시의 특징이 의식의 무변화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적 무변화성은 그의 시를 귀족주의적인 시로 혹은 개성적인 시로 만들고 있다. 통시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원인은 제대로 된 작품 연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데도 있다. 장석주가 편집한 ?김종삼 전집? 역시 시집을 중심으로 엮어졌기 때문에 통시적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김종삼의 시집은 주로 시선집이기 때문에 초기시와 후기시가 혼재되어 있다. 더군다나 김종삼 자신도 초기시를 다시 발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고는 두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어 김종삼 시인의 주제의식을 탐색하고자 한다. 첫째, ‘아름다움’과 ‘평화’의 모티프를 한국적 가치를 벗어난 보편적 가치로 보고자 한다. 둘째, 그의 시집을 해체하고 작품을 발표순에 따라 추적하여 무변화 속에서도 변주되고 있는 그의 시적 변이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음악과 회화적 주제에 의한 변주
김종삼 시인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 자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詩란 무엇인가? 나는 이 어려운 문제에 답하기보다 내가 시를 쓰는 모티브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살아가다가 ‘불쾌’해지거나, ‘노여움’을 느낄 때 바로 시를 쓰고 싶어진다.
이와 같은 ‘불쾌’와 ‘노여움’의 시학은 본고가 의도하는 ‘아름다움’과 ‘평화’의 시학으로 쉽게 변용될 수 있다. 그는 아름다움이 훼손당하는 순간에 불쾌했을 것이며, 평화가 깨어지는 것을 목도했을 때 노여웠을 것이다. 이때 본고가 김종삼의 시에서 보고자하는 ‘아름다움’은 내용이 없으며, ‘평화’는 형식이 없다. 만일 김종삼 시인이 국지적인 존재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한국적 의미로 채워져야 하며, 평화는 피해의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어떤 목적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평화는 모두에게 열려진 형식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김종삼 시인의 존재의식을 좀 더 광의의 범주에 놓고 바라보고자 한다.
또 한편 김종삼 시인은 시작(詩作)에 임할 때 그에게 뮤즈 구실을 하는 네 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名曲 <목신의 午後>의 작사자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준엄한 채찍질, 畵家 반 고호의 狂氣어린 熱情, 불란서의 건달 쟝폴 사르트르의 풍자와 아이러니칼한 饒舌, 프랑스樂團의 세자르 프랑크의 古典的 체취―이들이 곧 나를 도취시키고, 고무하고, 쓰게 하는 힘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준엄함과 광기어린 열정, 풍자와 아이러니, 고전적 채취는 음악과 회화에서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기질을 감지하게 한다.
본고는 거칠게나마 이러한 시작 방법을 원용해서 논리 전개의 형식적 흐름으로 삼고자 한다. 즉 김종삼 시의 통시적 전개를 음악과 회화의 주제에서 빚지려 한다. 먼저 그의 시적 전개는 3악장의 소나타와 같다. 제시부와 발전부와 재현부로 이어지는 현대 소나타 형식이 그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변증법적 전개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아름다움과 평화의 주제에 의한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김종삼 시의 배경을 음악의 보편성에서 찾은 김영태의 언급은 본고가 또 한 번 빚지고 있는 것이다. 김영태는 김종삼의 시 <돌각담>(1957)에서 그의 시가 음악적 프레임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廣漠한地帶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十字型의칼이바로꼽혔
다堅固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았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 凍昏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돌각담>의 전문
돌각담이 무너지고 다시 쌓이는 이 리프레임의 과정에서 이상(李箱) 시의 한 전형보다는 음악을 경청할 때 마음속에 자리잡는 주제에 의한 변주를 더 실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겨놓이던 돌각담이 마침내 세 번째가 비게 된 종결구에 와서 우리는 김종삼의 출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나는 그의 독특한 시적 전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적 전개를 틀로 해서 그의 주제의식은 회화적 효과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즉 소묘가 주는 의식의 정지 효과와 수채화가 주는 의식의 확산 효과 그리고 채색화가 주는 의식의 결합 효과가 병행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시적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제1악장 ‘제시부’ - 빛과 그늘의 소묘
김종삼 시의 제시부로서 제1악장은 1953년 등단 이후 1968년 3인 시집 ?본적지?가 나올 때까지를 설정하였다. 제1악장에서 김종삼 시인이 구사했던 시작법은 소묘의 회화적 기법이 가지고 있는 명암 효과이다. 채색하지 않고 주로 선을 사용하는 소묘의 기법처럼 이 시기 그의 시는 빛과 그늘의 극단적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이중주라 할 수 있다. 그 대립과 이중적 단면 속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생기를 잃어버린 멈춰버린 아름다움이다. 형식만 남아 있는 절대미의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기 그의 시는 추상적이며 비구상적이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의 비극적 인상이 가져온 죄의식의 산물이다.
1) 아름다움의 멈춤과 가치의 전도
이 시기 시적 대상은 멈춤 상태이다. 아니 시인은 움직이는 대상을 잡아 정지시켜 놓는다. 그 정지된 대상의 인상을 순간적으로 그려내기도 하며, 세부를 정밀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물
닿은 곳
神恙의
구름밑
그늘이 앉고
杳然한
옛
G․마이나
―<G․마이나―全鳳來兄에게>의 전문
이 시는 일종의 크로키 수법을 사용한 소묘라 할 수 있다. 시적 대상인 죽은 전봉래 시인에 대한 인물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인상만이 몇 개의 이미지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전혀 형상화할 수 없는 비구상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물․구름․그늘․G 마이나’의 연속적 스케치를 통해 시인은 전봉래 시인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빛이 없는 어둠, 그늘이다. 그래서 이 시의 전체적인 톤은 어둡고 침울하며 근심에 차 있다.
이와 같이 대상의 생략된 묘사는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어떤 구체적 관계와 의미를 탈색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제 단순한 아름다움만 남아 있는 것이다. 거기에 구체적인 시적 대상인 전봉래 시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애틋함이나 안타까움에서 오는 슬픔의 정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미풍이 일고 있었다
덜커덕거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噴水의 石材 둘레를 間隔들의 두 발 묶인 검은 標本들이
옷을 벗은 여자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여자의 눈은 擴大되어 가고 있었다
입과 팔이 없는 검은 標本들이 기인 둘레를 덜커덕거리며 선회하고
있었다
半世紀가 지난 아우슈비치 收容所의 한 部分을 차지한
―<地帶>의 전문
이 시는 시적 대상을 정밀 묘사한 경우다.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반세기 전 아우슈비치 수용소의 비극적 상황이 드러나고 있다. 어떤 채색도 가하지 않은 상태로서 독자로 하여금 이 밑그림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길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멈춰버린 시간 속에 잊혀진 과거의 반추 행위이며, 인간의 가장 추한 모습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구체화되지 않은 사건은 ‘검은 표본’의 이미지로만 추상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본질적 의미에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마비된 의식 세계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의 중심부로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부만 선회하는 그 의식적 행위에서 이 무채색의 그림 한 폭이 일으키는 파문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반세기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굵은 선의 질감과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의 터치와 정밀 묘사에 의한 소묘적 시작법이 초기에 나타난다. 이러한 기법이 노리는 것은 정지의 효과이다. 그 멈춤의 순간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탈색된 이미지의 정체는 그의 시에서 사물의 주변성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그리운 안니․로․리>에서
그세
키 작고 현격한 간격의 바위들과
도토리나무들이
어두움을 타 드러앉고
꺼먼 시공 뿐
선회되었던 차례의 아침이 설레이다.
―드빗시 산장 부근
―<드빗시 山莊>에서
머지않아 園頭幕이
비게 되었다.
―<園頭幕>에서
저는 교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의 학교도 교외에 있습니다.
―<五학년 一반>에서
나의 無知는 어제 속에 잠든 亡骸 쎄자아르 프랑크가 살던 寺院 주
변에 머물렀다.
............................
방 고호가 다니던 가을의 近郊 길바닥에 머물렀다.
―<앙포르멜>에서
위의 시들의 밑줄 친 부분처럼 시인의 시선은 위보다는 밑, 밝음보다는 어둠, 중심보다는 주변, 충일(充溢)보다는 비어있음에 가 닿아 있다. 이러한 사물의 주변성은 이 시기에 그가 추구했던 아름다음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게 김종삼 시인은 중심적 가치보다는 주변적 가치에 의미의 무게를 더 둠으로써 기존의 일반적 미의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있다. 힘과 현란한 색채의 에너지에서 분출되는 폭력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숨죽인 것들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오직 빛과 그늘의 명암 효과만을 누렸다. 그 아름다움의 대상은 반드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은 작고 왜소하다. 그 작은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세상은 멈춰 있다. 주변적 대상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그가 한국의 폐쇄적인 상황으로부터 나와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왜냐하면 당대 한국 시는 너무도 큰 대상과 감당할 수 없는 의미에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와 세계 간에 시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시적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김종삼의 시를 단순히 주지적인, 언어파적인, 난해한 시인으로 보기에는 그래서 순수시인으로 평가하기에는 그의 비어있는 부분을 보지 않으려는 어떤 목적의식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의 내용 없음을 보아내는 그의 개성은 우리 시에서 특수하다. 그러나 그 개성의 밑바탕에 인간 본연의 보편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전쟁과 죄의식
김종삼의 시에서 ‘전쟁’은 대체로 ‘학살’로 표상된다. 특히 어린 아이와 여인들의 수난으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쟁의 비극성은 빛과 그늘의 소묘라는 명암의 회화적 주제로 표현된다. 기본적으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기저에는 전쟁이 자리하고 있고 비극을 추상화시켜버린 탈색된 의식을 죄의식이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 김종삼의 시에서 전쟁의 참상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을 담는다는 것은 내용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추상적 소묘의 회화적 주제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단지 다음 시에서처럼 폐허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 지나쳤음을 증명하고 있다.
군데군데 잿더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못 볼 것을 본 어린것의 손목을 잡고
섰던 할머니의 황혼마저 학살되었던
僻地이다.
그 곳은 아직까지 빈사의 독수리가 그칠 사이 없이 선회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온 소리>에서
‘어린 것의 손목’과 ‘할머니의 황혼’의 질적 차이는 새 생명과 저물어 가는 목숨 간의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이다. 전쟁은 이 두 세대를 이어주기도 하고, 아예 적멸시키기도 한다. ‘빈사의 독수리’는 그러한 비극의 현장에서 사라져간 젊은 세대의 입지를 반영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겪는 죄의식이다. 여기서 ‘벽지’와 ‘선회’는 김종삼의 죄의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죄의식이 머무는 공간은 ‘벽지’와 같은 주변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죄의식이 유지되는 시간은 반복적이다. 이러한 죄의식은 다음 시에서처럼 원죄의식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안쪽과 周邊이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無邊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果實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 갔다.
―<園丁>에서
위의 시에서 시인은 ‘부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소독한 사과가 썩을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불구하고 그의 손만 닿으면 썩어가고 아예 썩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 ‘자기 부정’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죄의식은 윤회(輪廻)의 굴레와도 같은 것으로 생명과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김종삼 시인의 궁극적 지향점이 물리적인 죽음이 아님은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확인된다.
死産.
소리나지 않는 完璧
―<十二音階의 層層臺>에서
시인은 ‘사산(死産)’을 ‘소리나지 않는 완벽(完璧)’이라 은유적으로 표상 한다. 이것은 김종삼 시인 특유의 시적 인식으로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맥락이다. ‘완벽’이나 ‘아름다움’ 그리고 ‘충만’ 같은 속성을 추구하지만, 거기에는 대립 개념과의 조화와 교응(交應)을 담보로 한다. 빛과 그늘의 조화와 같은 것이다. ‘죽음’을 완성으로 보는 것은 확실하지만 ‘삶’과의 조화와 교응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김종삼 시인이 집착하는 사물의 벽지성(僻地性), 즉 주변성은 ‘인간 존엄성’과 등가적 의미라 할 수 있다.
전쟁과 희생과 희망으로 하여 열리어진
좁은 구호의 여의치 못한 직분으로서 집없는 아기들의 보모로서
어두워지는 어린 마음들을 보살펴 메꾸어 주기 위해
역겨움을 모르는 생활인이었읍니다.
................
그 여인의 시야는 그 어느 때이고
선량한 생애에 얽히어졌다가 죽어간 사람들 사이에 세워진 아취의
고요이고 아름다운 꿈을 지녔던 그림자입니다.
―<여인>에서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김종삼 시인의 초기 시에서 보이는 ‘그늘’ 즉 주변성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어떤 요구나 청원이 없는 본원적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전쟁을 희망으로 바꾸는 괴력을 부리며 성큼 다가선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가 갖는 아름다움이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말할 수 있다. 비록 전쟁에 대한 묘사가 추상적으로 드러나지만 그가 다루는 전쟁의 역사적 소재나 상황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학살과 한국 전쟁의 참상이 공존하고 있음을 볼 때 그러하다.
4. 제2악장 ‘발전부’ - 에토스와 파토스의 수채화
제2악장은 김종삼 시의 발전부로서 앞서 제시되었던 아름다움의 주제가 새롭게 변주되는 양상을 보인다. 제1악장에서 아름다움은 멈춰있고 그것은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고 시인은 죄의식에 싸여있음을 보았다. 이때 그의 시작법은 소묘의 정지 효과를 빌려 가치의 전도 양상을 드러내고 있음을 밝혔다. 제2악장은 이러한 가치전도의 상황을 극복하고 상실된 가치의 복원을 꾀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1978년 발표된 시 <풍경> 이전까지를 설정하였다. 그러므로 대략 1968년에서 1978년까지 발표된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윤리감과 비애감이라는 본질적 정서의 수액(水液)은 투명하다. 그 물을 통해 번져 가는 평화의 메시지는 형식이 없다. 평화의 추구나 지향은 제한적일 때 오만과 독선을 불러오는 것이고 급기야는 폭력을 수반하게 된다. 너와 나만의 평화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화가 성취될 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그 공간에서 살 수 있는 존재는 어린 아이 뿐이다. 어린 아이의 품성과 기질을 소유한 것들만이 그 곳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역으로 그들을 위해서 마련해야 될 공간이 그와 같이 형식 없는 평화의 공간인 것이다. 이 시기에는 앞서의 시기에서 볼 수 있었던 추상성이 제거되고 투명한 현실인식이 드러난다.
1) 평화의 번짐과 가치의 복원
이 시기에 아름다움이 멈춰버린 공간은 눈물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정서의 발산을 통해 평화의 공간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죽음과 추함을 털고 일어서는 변화로서 생명의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소유한 윤리감각과 비애의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예고는 1968년 발표된 다음 시에서부터 시작된다.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廣野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물桶>의 전문
이 시에서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이라는 발화체는 의미 심장하다. 그것은 ‘희미한 풍금소리’, ‘끊어지고’ 등의 어휘 속성에서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시인이 한 일이 무언가 커다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의 해답은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과 ‘영롱한 날빛’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자는 시인이 ‘물 몇 통 길어다 준’ 장소이고, 후자는 길어다 준 ‘물 몇 통’의 속성을 제공한다. ‘영롱한 날빛’에 대한 정보는 그 빛의 근원인 ‘태양’의 상징적 지식을 통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즉 태양의 속성이 ‘치유하는 자(healer)이며, 원상 복구자(restorer)이며, 천국과 낙원’임을 생각할 때, ‘날빛’은 ‘상처의 치유’며, ‘파괴의 복구’이며, ‘천국과 낙원’의 메시지인 ‘평화’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시 쓰는 행위’가 될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이는 ‘영롱한 날빛’은 ‘인간에게 길어다 준’ ‘물’의 속성이며, 시인이 지향하는 목표가 ‘눈부시게 찬란한 햇빛과 같은 시’라고 파악된다. 즉 그의 시는 세상의 주변적 존재 양식을 중심화시키려는 의지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전도된 가치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개입되는 시인의 의식은 에토스(ethos)와 파토스(pathos)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의 시에서 풍기는 도덕적 품위와 슬픔의 한기는 에토스적 예술의 객관성과 파토스적 주관성이 교묘히 조응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다음 두 시는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작아작 크고 작은 두 마리의 염소가 캬베스를 먹고 있다
똑똑 걸음과 울음소리가 더 재미있다
인파 속으로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나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서도 녀석들을 죽이지 않겠다
―<掌篇․1>의 전문
갈 곳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비 한 마리가 맞은편으로 어기적뻐기적 기어가고 있었다
연신 엉덩이를 들석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차량들은 적당한 시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수없는 차량 밑을 무사 돌파해가고 있으므로 재미있게 보였다
…………………
大型 연탄차 바퀴에 깔리는 순간의 擴散소리가 아스팔트길을 진동시켰다 비는 더욱 쏟아지고 있었다
무교동에 가서 소주 한 잔과 설농탕이 먹고 싶었다
―<두꺼비의 轢死>의 전문
인파 속을 헤치며 지나가는 두 마리의 염소와 수 없는 차량 속을 기괴하게 기어가는 한 마리의 두꺼비가 펼치는 상황은 위험하다. 그와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시인은 두 생명이 펼치는 평화의 몸짓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재미’있다고 표현하면서 말이다. 그 ‘재미’라는 언술 속에서 우리는 불안이 상존하는 평화의 위태로움을 느낄 수 있다. 평화는 깨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잔인함과 문명의 우악스러움 앞에서 산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깨어진 평화의 파편들은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거쳐 우리에게 확산되고 있다. ‘아작아작’, ‘똑똑’ 소리내는 그 어린 생명을 죽이지 않겠다는 엄숙한 도덕적 감성과 무참히 짓밟힌 생명에 대한 비애감이 우리를 서늘케 한다. 그 한기는 물기를 통해 수채화처럼 번져 가는 것이다.
다음 시는 수채화의 투명한 질감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여 에토스와 파토스의 두 요소를 적절히 융합시키고 있다. 형식 없는 평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1947년 봄
深夜
黃海道 海州의 바다
以南과 以北의 境界線 용당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民間人>의 전문
이 시는 생명에 대한 인간 본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수의 생명을 위해 어린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은 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윤리적 부채와 인간적 비애를 절감케 한다. 그것은 동양의 보편적 인간 인식론 중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서양의 ‘박애정신’과도 상통한다. ‘나’와 ‘남’이 통해서 하나가 되는 생명의 자기 확대, 자기 신장은 생명의 초월적 성격으로서 개체적 자아를 초월하여 전체와 하나가 되려는 생명의 요구에서 발생하는 ‘평화’의 정신이라 하겠다. 한 아기의 죽음을 통해 이 시를 읽는 독자는 개체적 자아로서의 ‘나’를 떠나 타인이 겪었던 슬픔을 함께 하게 된다. 아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목숨을 연명해야했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와 그 처지를 함께 할 수 있는 심정적 동조이며 평화의 확산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평화는 형식이 없다. 비록 한국적 분단 상황이 소재로 사용되긴 했지만 그 상황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너무도 보편적이다. 한국이라는 국지적 형식에 가둘 수 없는 평화인 것이다.
2) 가난과 연민의식
앞서 제1악장에서 분단과 전쟁의 참상은 추상적으로 소묘되었다. 그 추상성은 제2악장에 와서 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채색된다. 즉 가난이라고 하는 현실에서 구체화된다. 이때 가난을 바라보는 에토스적 엄숙주의와 파토스적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서이다.
아침엔 라면을 맛있게들 먹었지
엄만 장사를 잘 할 줄 모르는 行商이란다
너희들 오늘도 나와 있구나 저물어 가는 山허리에
내일은 꼭 하나님의 은혜로
엄마의 지혜로 먹을거랑 입을거랑 가지고 오마.
엄만 죽지 않는 계단
―<엄마>의 전문
계단은 그것을 이용하는 행위가 상승이든 하강이든 한 상태로부터의 이동 혹은 변화의 디딤돌이다. 이 시에서 ‘엄마’는 ‘계단’으로 구체화된다. ‘엄마’라는 계단을 밟고 변화되는 것은 저물어 가는 산허리에 매일 나와 엄마를 기다리는 그 아이들이다. 그러므로 엄마는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한다. 비록 ‘장사를 잘 할 줄 모르는 행상’이어서, 빈손이 되어 돌아오는 날이 많지만, 엄마는 가난을 극복하는 유일한 계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기 김종삼의 시에서 가난은 그의 중심적 시적 대상인 어린 아이에게 가장 위협적인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연민이 그들에게 고정될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 하나가 나어린 손자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할아버진 아침마다 손때 묻은 작은 남비,
나어린 손자를 데리고
아침을 재미있게 끓이곤 했다.
날마다 신명께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이들은 그들만인 것처럼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그들만인 것처럼
때로는 하늘 끝머리에서
벌판에서 흘러오고 흘러가는 이들처럼
이들은 기동차가 다니던 철뚝길
옆에서 살고 있었다
―<기동차가 다니던 철뚝길>의 전문
우리는 앞서 제1악장의 시〈어둠 속에서 온 소리〉에서 ‘어린 것의 손목’과 ‘할머니의 황혼’이 주는 극명한 이미지의 명암 대립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추상적으로 인지한 바 있다. 이 시에서도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이미지가 교차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화면은 ‘애정’과 ‘희망’이라는 물기로 채색되어 있다. 이러한 연민의식 속에는 보다 보편적인 인간 생명의 주체성이 자리하고 있다. 다음 시는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川邊 10錢均一床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掌篇․2>의 전문
이 시에서 ‘나’와 ‘남’이 엄격히 대립되면서 ‘나’의 독자적 인격이 주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생명의 주체성은 생명의 심화, 정화에 의해 생명의 자기 승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는 또 다른 동양의 인간 인식론 중 하나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인간 본성을 표출하고 있다. 혹은 서양의 개인주의적 주체성이라 할 수 있다. 무례한 행동을 당한 객체의 반발로 인해서 주체가 자기의 무례함을 자각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 수치이니 이것은 주체가 객체에 대한 부정을 자기의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행하는 것이다. 비록 평소에는 걸인의 신세이지만 어버이의 생일날만큼은 하나의 생명으로서 주체성으로 회귀 수축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는 제1악장의 시 <원정>의 자기부정의 죄의식과는 다른 가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시기 김종삼의 시는 ‘생명’의 초월성과 주체성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는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전쟁으로 잉태된 가난한 현실의 무기력함을 치유할 수 있는 경이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나눔과 평화의 나라이다. 마침내 그 평화는 인간의 형식을 넘어 다음 시에서처럼 확산되고 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墨畵>의 전문
우리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진다는 표현에 의해 ‘소와 할머니’의 관계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잠재적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이다. 그러한 정서의 전달은 수채화 기법처럼 담백하다. 이 시는 단순히 고단하고 쓸쓸하게 하루를 지낸 할머니의 심정을 통찰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어떤 화려한 채색도 가해지지 않는다. 제목그대로 수묵화의 전형이다. 그럼으로써 부리고, 부림을 당하는 관계였던 인간과 가축 사이의 갈등이 할머니의 손이 소잔등에 얹혀지는 새로운 관계설정을 통해 ‘위로와 교감’의 맥락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수묵화의 번짐 효과를 통해 사상(事象)의 에토스와 파토스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 가치의 복원을 꾀하는 시인의 위로와 평화의 메시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간과 가축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구정보(舊情報)가 할머니와 소와의 교감이라는 새 정보에 의해 기각되었듯이 상황의 역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살생에 대한 증오가 있고, 짓밟힌 삶에 대한 연민과 헌신이 있고,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이 있고, 다음과 같은 평화의 메시지가 있다.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평화롭게>의 전문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漁夫>에서
살다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
―<留聲機>에서
5. 제 3악장 ‘피날레’―영원과 미완의 채색화
제3악장 피날레는 김종삼 시의 재현부로서 미완성으로 끝나고 있다. 1978년에서 1984년 작고할 때까지의 시들이 해당된다. 이 시기에 그의 시를 뒤덮고 있었던 것은 음악적 주제에 의한 대위법이다. 그리고 회화적 주제에 의한 색채의 혼합이다. 즉 제1악장과 제2악장을 변증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강한 톤의 색채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소묘를 통한 영원성의 추구는 ‘죽음’을 그의 현실로 대면하게 했고, 그리다 만 수채화 그 미완의 평화는 그를 ‘초월의식’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제1악장의 추상성과는 다른 의미의 앵포르멜(informel)이다.
1) 아름다움과 평화의 대위법
이 시기 그의 시는 ‘아름다움’의 수직적 화음과 ‘평화’의 수평적 멜로디가 결합되고 있다. 그의 시가 펼치는 화음의 특질은 무변화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지속적으로 아름다움의 음감(音感)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전달하는 멜로디는 단속적(斷續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평화의 낮은 숨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미완의 여백 속에서 들리고 있다.
싱그러운 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오지 않은
樂器를 가진 아이와
손쥐고 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풍경>의 전문
제1악장과 제2악장에서 전쟁과 가난에 처해 있던 그 아이에게 피날레에 이르러 시인은 악기를 쥐어 주었다. 그 악기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것이기에 세상 손이 타지 않은 순수성을 아이에게 부여한다. 누구나 한번은 거쳤을 시간의 도정에서 싱그러운 풍광과 어울리고 있는 아이의 순백은 아름답다. 그러나 또 한편 비극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벙어리 악기의 기구함을 보기 때문이다. 연주되지 않는 악기의 침묵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시인이 그처럼 미완의 운명을 가진 아이와 손잡음으로써 우리는 잠시 평화를 맛볼 뿐이다. 그러나 평화는 침묵이라는 형식에 싸여있음으로 팽팽한 혹은 곧 깨어질 듯한 강한 색채를 띠고 있다. 이와 같은 강한 입체감은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형상이다. 불협화음(不協和音) 같은 이 구도가 김종삼의 시에서는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평화의 내용과 형식이 보편성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예술가와 이국적 풍경들이 그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어도 어울리는 소리와 색채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예술가들의 불행한 생애와 그의 삶과 공명하고 있다.
나의 막역한 친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병고를 치르다가 죽었다 향년 32세
장의비가 없었다
동네에서 비용을 거두었다
부인이 보이지 않았다
묘지로 운구 도중
비바람이 번지고 있었다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하나하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도망치고 말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實記>의 전문
베토벤을 따르던 한 소년이 있었지
그 소년과 산책을 하다가 어느 점포를 기웃거리다가
맥주 몇 모금씩을 얻어 마셨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끽끽거렸지
우리는 맥주를 마시긴 마셨지 하면서 끽끽거렸지
그는 田園交響曲을 쓰고 있을 때이다.
귀가 멀어져
새들의 지저귐도
듣지 못할 때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實記>의 전문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예술적 완성은 항시 삶의 비애와 맞닿아 있다. 김종삼 시인은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들의 예술성과 친교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제1악장의 시 <나의 本籍>에서 발원하고 있다.
나의 本籍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敎會堂 한 모퉁이다.
나의 本籍은 人類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나의 本籍>에서
김종삼은 자신의 근본을 한국의 국지적 특수성에 두지 않고 인류의 보편성에 두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운위했던 주변성들은 위의 시에서처럼 근본적으로 인류 보편의 특질에 근원을 대고 있다. 김영태는 이러한 김종삼의 특질을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토착화된 언어보다 코스모폴리탄의 잠재성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언어의 운용이 한국의 향토성(鄕土性)을 드러내지 않고 재구성하여 서양과 동양의 엄청난 격리감을 쉽게 메꾸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의식은 이러한 보편성이 수용되지 않는 한국 문단의 특수성이 한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2) 죽음과 초월의식
피날레에서 교묘히 이루어진 아름다움과 평화의 결합은 음색의 계기를 인상적으로 표현하려는 주제의식에서 비롯된다. 그 상징적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죽음의 그림자다. 김종삼 시인은 지난 반세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어머니와 동생과 친구와 어린 아이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죽음도 예감한다. 그래서 그는 늘 죽음과 친근하였다. 죽음과 밀착된 그의 내면을 다음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나도 낡고 신발도 낡았다
누가 버리고 간 오두막 한 채
지붕도 바람에 낡았다
물 한 방울 없다
아지 못 할 봉우리 하나가
햇볕에 반사될 뿐
鳥類도 없다
아무 것도 아무도 물기도 없는
소금 바다
주검의 갈림길도 없다.
―<소금 바다>의 전문
시인은 세상을 소금 바다로 기술하면서 거기에 죽음의 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죽음의 공간에는 ‘물, 햇볕, 조류’ 등 생명과 관계된 물상은 아무 것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부재의식은 죽음을 일상 속에 개입되어 있는 연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나아가 죽음이 삶의 영역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삶과 죽음이 함께 거주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 시에서처럼 죽음을 모면한 사건을 겨울 피크닉에 다녀온 것으로 비유하고 있고, 죽어서도 살아서의 감각과 욕구가 이어지고 있다.
얌마 너는 좀 빠져 꺼져
죽은 내 친구
내 친구
목소리었다.
―<겨울 피크닉>에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주먹만하다 집채만하다
쌓이었다가 녹는다
교황청 문 닫히는 소리가 육중
하였다 냉엄하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비드像 아랫도리를 만져보다가 관리인에게 붙잡혀 얻어터지고 있었다
―<내가 죽던 날>의 전문
이러한 죽음의 일상성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연속성을 가져야 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혼은 거주할 공간을 잃게 된다. 그래서 시 <라산스카>에서 시인은 ‘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피날레에서 던지는 김종삼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은 비극적 현실 앞에서도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미동도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그의 최후의 음악은 다음과 같이 변주되어 초월하고자 한다.
세자아르 프랑크의 音樂 〈바리아숑〉은
夜間 波長
神의 電源
深淵의 大溪谷으로 울려퍼진다
밀레의 고장 바르비종과
그 뒷장을 넘기면
暗然의 邊方과 連山
멀리는
내 영혼의
城郭
―<最後의 音樂>의 전문
일상의 주변성 속에 머물던 그의 음악은 그곳을 벗어나 신(神)의 존재를 밝히는 원천으로 복무하게 된다. 어린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그의 영혼의 그림은 멀리 암연 속으로 굽이쳐 가고 있다. 이러한 변주의 파장과 굴곡은 일상성을 완전히 탈색한 듯이 보인다. 진정으로 내용을 거둬낸 아름다움이며, 진실로 형식 없는 평화의 고장에 가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초월이지만 그러나 한편 미완의 노래일 뿐이다. 김종삼 미학의 튼튼한 전령사인 아이들은 늘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늘도 땅도 아닌 그 중간 산 중턱 ‘아리랑 고개’에서 살다 갔다.
6. 결론
김종삼의 시는 ‘아름다움’과 ‘평화’가 응축(凝縮)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그가 설정한 시의 나라에 갈 수가 없다. 그 나라에 들어간다 해도 풍경의 낯설음으로 해서 우리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왜일까? 우리는 늘 그의 시에서 상투적으로 ‘아름다움’의 내용을 찾으려 했고, ‘평화’의 형식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와 함께 그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펼치는 시의 ‘아름다움’은 내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평화’에는 형식이 없다. 아름다움에 내용이 없다는 것은 미적 추구의 허위(虛僞)나 가식(假飾) 혹은 허상(虛像)을 말함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도 그의 시에서 한국적인 전통적 아름다움을 보아내지 않는다. 간혹 읽혀지는 가족 간의 측은함과 이웃과의 공동체 의식조차도 그 밑바탕에는 인류 보편의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전쟁은 우리만의 고립된 고통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함께 앓고 있는 전염병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눈에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다.
평화에 어떤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차별 없이 누리는 안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김종삼 시에 나타난 평화에 대한 추구는 분단된 한국 민족만의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비극이 곧 인류의 비극으로서 확산될 때 큰 범주 안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김종삼 시인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종삼의 시에서는 낯선 이국의 풍경과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그것이 그렇게 낯설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때 아름다움과 평화의 온전한 수혜자이며 그 전령(傳令)들이 ‘어린이’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김종삼의 시에서 어린이는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 인류의 아름다움이 유지되고 평화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인간의 가치가 전도된 상황에서 그 가치를 복원하려는 한 코스모폴리탄의 궤적을 살펴보았다.
― 김학동 외 지음「한국 전후 문제시인 연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