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살다간 김종삼
장석주
『십이음계』
한 늙고 추레한 노인이 가난한 산동네의 구멍가게에 들어온다. 무허가 집들이 들어찬 산 8번지의 한 구멍가게다. 그 동네에는 개백정도 살고, 상처한 복덕방 영감도 살고, 막노동꾼도 살고, 술집 나가는 아가씨도 산다. 과자 부스러기, 라면, 소주, 일용 잡화 몇 가지로 겨우 구색을 갖춘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다. 마침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없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얼른 소주 두 병을 집어 든다. 밖으로 나온 노인은 구멍가게에서 훔친 소주 두 병을 옷 안에 꼭 숨긴 채 어디론가 허청허청 발걸음을 옮긴다. 그가 저 유명한 시집 『북치는 소년』의 시인 김종삼(金宗三, 1921~1984)임을 알아볼 이는 거의 없을 터. 나중에 소주 두 병 값을 갚긴 했으나, 이 무렵 시인은 구제불능의 알코올 중독자로 지낸다. 그는 집에서 책을 들고 나와 헌책방에 넘기고 받은 몇 푼으로 소주를 마시거나, 동네 세탁소 주인에게 구걸하듯이 소주값을 빌리기도 한다. 예전부터 그를 아는 세탁소 주인은 “깔끔하시던 분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혀를 찬다.
말할 수 없는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던 말년의 김종삼에게 ‘황야’처럼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술’은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요 도피처였고,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의 술에 대한 애호는 「극형(極刑)」의 “구멍가게에 기어 들어가 / 소주 한 병을 도둑질했다 / 마누라한테 덜미를 잡혔다 /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토큰 몇 개와 / 반쯤 남은 술병도 몰수당했다”라는 진술처럼, 실제 식구들이 그의 용돈을 몰수했을 때 남의 가게에 들어가 소주를 훔쳐 마실 정도였다. 그에게 술은 “인간 되었던 모진 시련 모진 추함 다 겪고서”(「라산스카」) 산 사람의 거덜 난 영혼을 의탁할 한 안식처로 다가온다.
술은, 그에게 찰나적이지만, 시 「성하(聖河)」의 “잔잔한 성하의 흐름은/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더 환하다”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순한 기후 속에서 더욱 환한 “성하의 흐름”의 세계를 베푼다. 술에 도취되어 있을 때 그는 쓰라린 현실로부터 해방되어 잠시나마 기쁨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순수 고전 음악에 대한 집착, 이국 정취에 대한 애호 또한 그의 ‘술’ 이미지의 내포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루는 집을 나간 김종삼이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를 봤다는 사람도 없고, 열흘이 지나도록 그의 종적은 묘연하다.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고도 며칠이 지난 뒤에야 식구들은 시립 병원에서 그를 찾아낸다. 술에 만취해 주검처럼 길가에 널브러져 있던 그를 누가 거기에 입원시킨 것이다. 그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열흘이 넘게 사경을 헤매던 끝에 가까스로 깨어나, 늦게서야 가족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김종삼은 일어나 걸어 다닐 만하자 병원 여기저기로 마실을 다닌다. 시체실 주위를 배회하기도 하고, 중환자실의 침상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얼굴도 들여다보기도 하고, 특별치료 병동 중환자 보호 대기실에서 보호자 되는 이들과 말벗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치료를 받은 뒤 시립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식구들은 그에게 일절 용돈을 주지 않는다. 한 푼이라도 생기면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소주를 사 마셨기 때문이다. 앞서 본 대로 김종삼은 도둑질이라는 방법도 마다 않고 소주 두 병을 확보한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알코올 중독이 아니었다면 그는 깔끔하고 행동이 번듯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상처한 복덕방 영감이 석 달 만에 서둘러 재취를 들였다가 심장마비로 죽자 매장에 필요한 사망진단서를 떼다 준 사람이 김종삼이다. 그는 하릴없이 인파 속에 섞여 어정 어정 걷다가 충무로의 한 평 남짓한 자그만 카세트 점포에서 흘러나오는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는 슈베르트의 「보리수」에 취해 한참을 서 있곤 한다. 그는 “팝송 나부랭이와 인기 대중가요가 판치는” 세상을 몹시 마땅찮게 여긴다.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이 나오는 곳에서 커피 한잔이라도 마시면 “속이 메슥거려 기분 나쁘게 먹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시에 가끔 나타나는 “죄 많은 아비는 따우에 / 남아야 하느니라”(「음악」), “그 언제부터인가 / 나는 죄인”(「꿈이었던가」), “나 지은 죄 많아 / 죽어서도 / 영혼이 / 없으리”(「라산스카」), “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보자”「형(刑)」에서처럼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 즉 내면의 원죄의식이 있었다. 이는 그의 의식 형성에 적지 않게 개입되었을 서구 기독교 문화의 교양적 산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혐오, 부정하는 ‘방대한 공해’ 속과 같이 타락한 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자학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죄 없는 것, 순수한 것, 평화로운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린아이들과 순수 고전음악으로 대표되는 예술의 세계이다. 그것은 현실 타락한 영혼의 세계/피안 순수한 영혼의 세계로 대립을 이룬다. 그의 폐쇄적 고독과 소외의식은 그가 생활을 거부했던지 아니면 그가 생활로부터 거부당했던지 간에 그 생활로부터의 유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미 그의 삶이 순수한 영혼의 세계의 한 전형으로 인식한 어린아이들과 순수 고전음악의 세계와 같은 절대순수·절대조화의 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절망과 자학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김종삼은 1921년에 황해도 은율(殷栗)에서 태어났다. 군 장성출신으로 시를 썼던 김종문은 그의 형이다. 그의 부친은 신문기자를 지낸 지식인이었다. 나중에 《평양공론》이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 김종삼은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평양의 숭실중학교 다니다가 중퇴하고,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시마상업학교에 편입해 다닌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귀족들만 다니는 도쿄문화학원에서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가 음악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안 그의 부친은 일체의 송금을 끊어버렸다. 그는 1944년 도쿄문화학원을 중퇴하고 도쿄출판배급주식회사에 들어간다. 그해 12월에 그 회사를 나와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며 고학을 한다. 그 시절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해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고,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의 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고전음악만을 틀어주는 도쿄의 르네상스 다방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나든다. 해방 뒤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47년 2월, 극단 ‘극예술협회’에 입회해 연출부에서 일하기도 한다.
김종삼은 유서 깊은 고전음악 마니아였다. 김종삼은 전봉래, 전봉건 형제들과 함께 사변 전의 유명한 고전음악감상실이었던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 라아뿌륌의 단골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돌체가 피난지 부산 역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김종삼은 그곳을 단골로 드나든다. 돌체는 피난지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 때로는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돌체의 홀에서 잤고, 아침이면 바하를 틀어놓고 세수를 하기도 했다. 그때 김종삼은 여기저기서 훔친 마태 수난곡의 독창판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의 SP판도 소지하고 있었다. 시인이며 불문학도였던 전봉래가 전후의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자살을 했던 것도 그 즈음이다. 그의 품에는 항시 「원정(園丁)」, 「G. 마이나」와 같은 처녀작 원고가 들어 있었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처녀작 원고를 본 뒤 《문예》에 추천을 받게 해주겠다고 갖고 갔으나 한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로 《문예》의 추천위원들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김종삼은 전시 중인 1951년에 시 「돌각담」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시단에 선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문학 활동은 1953년부터이다. 그는 《문예》에서 거절당한 뒤 평론가 임긍재가 주간으로 있던 종합잡지 《신세계》에 「원정」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김춘수에 의해 극찬을 받은 「원정」은 그의 초기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평과(果) 나무 소독이 있어 / 모기 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 어느날이 되었다. // 며칠만에 한번만이라도 어진 / 말솜씨였던 그인데 / 오늘은 몇 번째나 나에게 없어서는 /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 주고야 마는 것이다. //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는 과수밭 / 사이인 /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 길 줄기를 벗어나 /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 식물이 풍기어 오는 / 유리 온실이 있는 / 언덕쪽을 향하여 갔다. //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 기척이 없고 무변(無邊)하였다. / 안쪽 흙 바닥에는 /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깔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 몇 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 갔다. /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김현은 「원정」의 형식적 특성인 ‘묘사의 과거체 사용’과 그것의 시적 효과로 ‘설화성’을 김종삼 시의 두드러진 특성으로 지적한다. 그는 이 시의 뒤에 숨어 있는 의미론적 특성으로 세계와 시적 자아 사이의 ‘비화해적’ 관계, 즉 시인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극적 세계인식’에 주목한다. 「원정」에 대한 김현의 분석은 그 이후 김종삼 시에 대한 다른 평자들, 황동규나 이승훈 등에 의해 거의 공식화된다.
‘원정’은 시적 자아에게 ‘길’을 가르쳐 준다. 그 길은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이다. ‘원정’은 몇 번씩이나 그리고 ‘기어이’ 그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곳은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쪽”인데, 그곳의 “안쪽과 주변”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이 없다. 거기서 ‘나’는 가득 차 있는 과실을 집는데,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같이 썩어 있거나 벌레가 먹었다는 것이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은 단정적으로 ‘내’게 “당신이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원정’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또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그리고 과실은 무엇이고, 썩고 벌레 먹은 과실들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가. 문학의 전통적 상징문법에 비추어보면, ‘과수원’은 절대순수, 절대조화의 세계, 즉 낙원을 표상한다. ‘나’는 그 낙원으로부터 거부당한다. 거기에 이미 시인의 이 세계의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원정’은 세계와 시적 자아를 연결해주는 사람이다. ‘원정’이 ‘나’에게 가르쳐 준, 삶의 보편적 당위로 열린 길이란, 시인을 둘러싼 실존적 조건 속에서 거역할 수 없이 주어져 있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인된 규범적·당위적 삶의 길이다.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론의 압력은 자유로운 혼의 소지자인 시인의 삶을 숨 막히게 한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조용히 순응한다.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은, 시인의 자유로운 혼의 충동과 지향을 지배하는 내면의 판관(判官), 이성의 목소리이다. 그 순응 속에 김종삼의 시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비극적 세계인식이 깃든다. ‘과실’이란 지상의 나무에 매달린 태양, 응고된 불꽃이다. 그것은 대지적 삶이 거두는 수확물이다. 그것은 인류에게 유익한 것, 풍요와 명성을 가져다주는 것, 대지 위에서의 거친 노동과 수고의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 이를테면 세속의 삶을 빛나게 하는 보석, 명성, 권위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집은 과실들의 한결같은 부패와 훼손된 모습은, 시인의 자의적 선택이든 운명의 불가피한 소여이든, 결국 ‘나’가 그 길을 예사롭게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한 비극적 전망의 통찰이 날카롭게 표현된 것이다. ‘과수원’이 순결, 질서, 조화, 풍요의, 밝고 맑은 낙원의 이미지라면, ‘나’가 자신의 자리로 예감하는 세계는 타락, 혼란, 분열, 결핍의 어둡고 혼탁한 실낙원의 세계이다.
김종삼은 1963년 2월에 동아방송 총무국에 촉탁으로 입사했다가 1967년 일반사원이 되어 제작국으로 옮겼다. 그 이후 그는 10여 년간을 동아방송에서 음악효과를 맡으면서 1976년 정년으로 동아방송을 나올 때까지 그는 원 없이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남들이 다 퇴근한 뒤 자정 너머부터 혼자 음악을 들었다.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그는 방송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방송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의아해하는 방송국 수위에게 손을 번쩍 들어 “시그널 몇 개 만들려고……”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텅 빈 레코드실에서 옷 속에 감춰 들여갔던 소주를 따고 혼자 모차르트를 들었다. 어떤 곡은 며칠 몇 달씩을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오랫동안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도 그 흔한 직책 하나 맡은 적이 없지만 그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의 『십이음계』에 수록된 「시체실」이란 시는 그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체실’은 이 세계의 축소된 정경이다. 교통사고, 음독, 병사로 들어온 시신들이 널려 있는 ‘시체실’의 정경을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건조한 문체로 보여준다. 그 절제된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나는 것은 “우리는 달리는 열차 속에 앉아 있었다. /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 터널 속을 지나고 있다.”라는 그 시의 마지막 연에서이다.
그는 죽기 한 달 전 1984년 11월호 《문학사상》에 「전정(前程)」이라는 시를 발표하는데, 그때 시작노트에서도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구질구질하게 너무 오래 살았다. 더 늙기 전에, 더 누추해지기 전에 죽음만이 극치가 될지도 모른다. 익어가는 가을 햇볕 속에 작고한 선배님들이 반갑게 아른거린다.”라고 썼다. 그에게 삶은 구질구질한 것, 누추해지는 것이고, 죽음만이 극치가 된다.
이런 김종삼의 삶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초월적 낭만주의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낭만주의에서의 죽음은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세계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현세 지상주의의 삶의 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죽음을 통해 삶의 극치를 실현하려는 시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죽음을 ‘세상 삶의 폭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항구적인 영혼의 평화를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낭만주의자들의 인식론과 닿아 있다.
그의 여러 시편에서 김소월, 조지훈, 박목월, 장만영, 김수영, 전봉래, 김관식과 같은 선배시인들이나, 작곡가 윤용하, 영화배우 나운규 그리고 다른 작가, 화가의 이름 들이 자주 나타나고, 작고한 그들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을 자주 되새기는 것도 그들이 죽음을 통하여 그들의 삶과 예술을 완전한 극치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시인의 생각을 반영한다. 수모와 모욕으로 가득 찬 이 현실세계에서의 생활은 늘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신성한 것, 가장 평화로운 것, 극치의 것을 추구해 온 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견딜 수 없이 치욕스러운 것, 구질구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물통」), “이 시각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느냐다 무엇 하나 변변히 한 것도 없다”(「시작(詩作)노우트」), “나는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 부인터 공동묘지를 향하여 / 어머니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 세상에 남길 만한 / 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 그러나 / 아직도 못 썼다고”(「어머니」)와 같은 싯구는 시인의 사회적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고뇌어린 조용한 반성을 보여준다. “무엇을 하며 살아 왔느냐”라는 자신의 내면을 향한 물음에 “무엇 하나 변변히 한 것도 없다”라거나,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을 길어다 준 것밖에 없다는 진술은, 다름 아닌 자신의 시작행위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정직한 반성이다. “물 몇 통”이 인간사회 속에서 높은 환금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시가 그와 같다.
김종삼은 물신숭배가 팽만해 있는 산업사회 속에서 겨우 물 몇 통과 같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사회적 유용성만을 가진 가치를 추구하는 데 따른 회의와 허무, 부끄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 일렁이는 회의와 허무,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같은 시에서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과 신념이 얼마나 강했던 지를 잘 보여준다. 어머니가 누워 있는 곳을 향해 시인은 “세상에 남길 만한/몇 줄의 글이라도 쓰고 죽는다고” “속으로 치열하게 외친다.” 그의 시 전체를 통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외치는 행위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물론 그것도 속으로이지만, 그 외침은 그 돌연하게 솟구치는 불꽃과 같다. 그 불꽃은 비극적 삶을 질료로 하는 불꽃이다. 그것은 이 어둡고 타락한 세계 속에 예술혼이라는 빛을 뿌리는 불꽃이다.
김종삼의 시 세계는 소월, 만해의 상실과 체념의 누적화에서 비롯된 비애적 초월주의, 미당의 토속주의, 청록파의 자연주의들에 대한 부정·극복 명제로, 전후 한국시의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른 김춘수 해탈의 시학과 김수영 풍자의 시학 사이에 있다. 그의 시는 내용적으로는 해탈의 시학에 접근해 있으면서도 그 형식적 측면에서는 그것을 배반한다. 그런 점에서 그만의 독자적인 시학을 구현하는 김종삼은 한국 현대시사에서의 그의 새로운 자리매김이 요청된다.
황동규는「잔상(殘像)의 미학」이란 글에서 김종삼을 “소시민주의자들과 대시민주의자들” 사이에 있는 ‘무시민주의자’라고 말한다. 이 ‘무시민주의자’라는 용어는 어색한대로, 김종삼의 무정부주의자적 삶의 한 단면을 설명해준다. 김종삼이 추구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 즉 내용에 대한 형식 우위의 미학주의, 예술주의, 보헤미아니즘은, 김종삼의 초월적 낭만주의를 떠받치는 지주들이다. 그 초월적 낭만주의 시학은 세계와의 영원한 비화해의 고통 속에 잠겨 있는 자아가 통찰한 세계에 대한 비극적 비전이 완성한 시학이다. 김종삼의 시에 깃들어 있는 비극적 비전의 형성은, 그가 거덜 난 현실 속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그의 초월적 감각의 눈으로는 세계 저 너머의 피안 순수의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그 응시는, 현실/전망의 불일치, 그 영원히 뛰어넘을 길 없는 인간조건의 비극과 부조리에 대한 민감한 의식의 눈의 응시이다.
김종삼의 시들은 그 비극적 자각의 눈에 비친 세계상을 그만의 독자적인 시형식 불완전한 구문, 자주 급격히 끊어지는 리듬, 논리적 유추를 거부하는 생략과 비약, 뜻 모를 여백들을 사용해 노래한다. 그 노래는 논리적 사유 이전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의 시 세계는 설명하기 어렵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 가난한 아희에게 온 / 서양 나라에서 온 /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 진눈깨비처럼
「북치는 소년」의 전문이다. ‘가난한 아희’에게는 멀리 있어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 아니 본디부터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서양나라’ 피안이 자아의 내면을 환하게 밝혀준다. 그것은 더럽고 누추한 현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비현실적 세계이다. 두 세계의 거리에서 비극적인 자각이 생겨난다.
1979년 초봄이었다. 출판사의 말단사원이자 그해 신춘문예를 통해 막 문단에 나온 신출내기 시인은 같은 출판사의 편집장과 함께 인쇄소를 갔다 오다가 무교동에서 점퍼 차림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오는 김종삼과 마주친다. 낡은 등산모, 커다랗게 솟아있는 귀, 그리고 어정어정 걷는 걸음…… 그는 “나는 누구나 가는 길을 /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라는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그가 김종삼 시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챈다. 김종삼은 거두절미하고 거리에서 만난 그 편집장, 아니 후배시인에게 다짜고짜로 세금 2천 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즈음 시인은 그렇게 지인들을 만나면 소줏값을 갈취했다.
어느 날 시인은 출판사의 편집실에 예의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불쑥 모습을 나타낸다. 생전 시인의 별명은 도깨비였다. 시인은 그렇게 도깨비처럼 출판사 편집실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품에서 원고를 꺼내더니 후배 시인에게 베껴 쓰라고 했다. 그의 육필 원고의 글자는 주먹만 하다. 그것들의 획은 날카롭게 직선으로 뻗어 있고, 좁은 원고지의 네 칸이 답답하다는 듯이 훨씬 벗어나 있다. 새로 정서한 원고를 받아들고 자신의 친필 원고와 천천히 대조를 마친 시인은 원본을 후배 시인에게 내민다. 며칠 전 2천원의 갈취에 대한 우아한 답례였다.
예술가는 제 작품 속에 제 삶의 경험과 시대, 그리고 삶과 예술 활동을 통해 줄기차게 추구한 사회적 의의와 이념, 시대와 세계에 대한 통찰에서 얻어진 총체적 비전을 표현한다. 김종삼은 생전에 펴낸 세 권의 시집 즉 『십이음계』(삼애사, 1969), 『시인학교』(신현실사, 1977),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민음사, 1982)와, 두 권의 시선집 『북치는 소년』(민음사, 1979), 『평화롭게』(고려원, 1984)를 통해 삶에 대한 비극적 비전을 보여준다. 그의 시 세계를 어둡게 착색하고 있는 삶에 대한 비극적 비전의 주제들은 시인의 상상세계에 충만된 세계와 자아 사이의 갈등과 불화, 그의 시적 자아가 취하는 생활적·규범적 삶의 거부, 그리고 어린 아이와 예술가들의 세계로의 극단적 경사를 드러낸다. 그의 시는 생활 / 예술 타락한 가치체계 / 순수한 가치체계의 대립 위에 서 있다.
시인은 영원한 보헤미안이고, 무산자(無産者)였으며, 생활인으로서는 철저하게 무능력자였다. 따라서 그의 인생에는 생활이 없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시와 음악과 술이었다. 그는 다만 시인이었다. 때로 그는 자조적으로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라고 내뱉었다. 「제작(製作)」이라는 시에서 “그렇다 / 비시(非詩)일지라도 나의 직장(職場)은 시(詩)이다”라고 선언했듯이 그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시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그를 끈덕진 채권자처럼 따라다닌 가난과, 알코올 중독에서 비롯된 건강의 악화로 말년을 더할 수 없이 누추하고 힘겹게 보내던 그는 1984년 12월 8일, 쓸쓸하게 이승의 삶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