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베누스 푸디카 - 박연준

공산(空山) 2019. 8. 11. 07:05

   베누스 푸디카

   박연준

 

 

   옛날, 옛날, 옛날

   (뭐든지 세 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 있는 느낌)

 

   어둠을 반으로 가르면

   그게 내 일곱 살 때 음부 모양

   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 있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

   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

 

   연필을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다

   등허리를 쩍, 소리 나게 맞았고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했지 여러 번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죽은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연기처럼 흐르다 박혔고

   그렇게 글자를 배웠지

 

   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

 

   나는 종종 큰 보자기에 싸여 버려졌고

   쉽게 들통 났고,

   맹랑했지

   (끝내 버려지는 데 실패했으니까)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 가다

   견디지 못하면

   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 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 이라고 믿었지만

 

   일곱 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 Venus Pudica : 비너스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용어.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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