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신현림
그때 책이 가득 든 가방이 있었고
낙서판 같은 탁자마다 술이 넘쳐 흘렀네
괜찮은 사내며 계집이며
가까워질수록 잃을까 불안한 심정이며
시대가 혼란스럽고 취직이 힘들수록
쟁기처럼 단단해져야 할 마음이며
「아침이슬」과 미칠 듯이 파고드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를 들으며 몸 저리게 서러웠네
세월의 징검돌을 밟고
그들은 내 곁을 스쳐 갔네
다시 칠 년 다시
소독약보다 지독한 시간이여
청춘의 횃불이 꺼져간다
괴로워야 할 치욕도 상처의 저수지도 잊어가고
우리의 숙명인 열정도 식어간다
근근이 살아가는 고달픔이란,
너는 허기져 삽살개를 찹쌀개로 헛발음하고
시계 사준다는 말이 나는 시체 사준다는 말로 들리고
혼자가 싫어 드라큐라라도 함께 있고픈 주말
사나운 날씨를 못 견뎌 헤매는 오후 네 시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세기말 블루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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