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나무, 사슴 - 이경림

공산(空山) 2019. 4. 25. 10:29

   나무, 사슴

   이경림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질기게 견디면 나무 둥지 속에 염통이 생기고 쓸개가 생기고 고요히 흐르던 연둣빛 수액이 뛰노는 붉은 핏물이 되는 걸까

   얼마나 멍하니

   얼마나 머엉하니 기다리면 수십 년 붙박였던 뿌리가 저리 겅중거리는 발이 되는 것일까

   아직 나무였던 시간들이 온 몸에 무늬로 남아 있는데

   제 몸이 짐승이 된 줄도 모르고 자꾸 허공으로 가지를 뻗는 철없는 우듬지를 그대로 인 채

   저 순한 눈매의 나무가

   한 그루 사슴이 되기까지는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중앙북스, 2011.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신현림  (0) 2019.05.02
앵두의 길 - 이경림  (0) 2019.04.25
비둘기들 - 이경림  (0) 2019.04.25
개미 - 이경림  (0) 2019.04.25
위험하다, 책 - 이명수  (0) 201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