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개미 - 이경림

공산(空山) 2019. 4. 25. 10:08

   개미

   이경림(1947~ )

 

 

   첫새벽,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보았다

   어떤 묵언처럼

   곰곰 지나가는 당신을

 

   문득 달려든 형광 빛도

   천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시선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가지런한 속도로 지나가고 계셨다

 

   형용을 알 수 없는 쬐그만 얼굴로

   털실 보푸라기 같은 다리로

   끊어질 듯 가는 허리로

   집채만한 허공을 지시고

 

   거대한 식탁의 다리를 지나

   의자 다리를 돌아

   내용 없는 상자의 긴 모퉁이를 돌아

   바싹 마른 걸레 위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지나

   얽힌 전선들 사이로 난 끈적한 길을

   다만 지나가고 계셨다

 

   발소리 하나 없었다

   한번 뒤돌아본 일도 없었다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 길이셨는지

   눈 깜박할 사이 거대한 은빛 냉장고 밑으로 사라지셨다

 

   잠결이었다

   오줌 누러 갔다 오는 몇 발짝 사이

   어떤 미친 시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으로

   달려가는 사이

   글쎄 백년이 지났다고!

 

 

     『급! 고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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