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이경림(1947~ )
첫새벽,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보았다
어떤 묵언처럼
곰곰 지나가는 당신을
문득 달려든 형광 빛도
천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시선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가지런한 속도로 지나가고 계셨다
형용을 알 수 없는 쬐그만 얼굴로
털실 보푸라기 같은 다리로
끊어질 듯 가는 허리로
집채만한 허공을 지시고
거대한 식탁의 다리를 지나
의자 다리를 돌아
내용 없는 상자의 긴 모퉁이를 돌아
바싹 마른 걸레 위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지나
얽힌 전선들 사이로 난 끈적한 길을
다만 지나가고 계셨다
발소리 하나 없었다
한번 뒤돌아본 일도 없었다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 길이셨는지
눈 깜박할 사이 거대한 은빛 냉장고 밑으로 사라지셨다
잠결이었다
오줌 누러 갔다 오는 몇 발짝 사이
어떤 미친 시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으로
달려가는 사이
글쎄 백년이 지났다고!
―『급! 고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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