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30

허수경의 「공터의 사랑」 감상 - 박준

공터의 사랑   허수경(1964~2018)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혼자 가는 먼 집』1992.    ---------------------------------------   태어난 지 200일 무렵부터 아이에게는 영속성이라는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영속성은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

해설시 2024.09.10

정우신의 「메카닉」 감상 - 박소란

메카닉   정우신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 아픈 사람도 기계로 고쳤다   비가 오거나 스님이 시주를 오는 날이면 톱날을 교체하곤 했다   삼촌은 언제 뭉툭해졌더라   몇 번째 톱날이었더라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지던 날   우리는 기름이 떠다니는   미숫가루를 마시며   철판을 옮겼다     ―『미분과 달리기』2024.6    ----------------------------------------   수리공, 기계공 등의 뜻을 지닌 “메카닉(mechanic)”은 속어로 살인 청부업자를 이르기도 한다고. 당연히 시인은 이 모든 의미를 두루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그런 만큼 시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로 시작해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졌다에 이르는 ..

해설시 2024.09.10

조해주의 「밤 산책」 감상 - 나민애

밤 산책   조해주(1993~ )     저쪽으로 가 볼까    그는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얇게 포 뜬 빛이   이마에 한 점 붙어 있다    이파리를    서로의 이마에 번갈아 붙여 가며   나와 그는 나무 아래를 걸어간다     ―『가벼운 선물』     ---------------------------------   만약 이 시인이 화가라면, 이 시가 그림이라면, 나는 이 그림을 꼭 갖고 싶다. 돈을 모으고 낯선 화랑에 가서 ‘이 그림을 살게요’라고 말하고 싶다. 방에 걸어 두고 내 마음에 걸어 둔 듯 바라보고 싶다. 시인이 말하듯 그려 놓은 밤 산책을 나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무 좋지 않은가. ‘얇게 포 뜬 빛..

해설시 2024.09.10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 이근화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이근화(1976~)     할머니는 이제 없지만   엄마의 몸속에 할머니가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   엄마가 나를 낳아   내 몸속에 엄마가 다시 산다면   내 몸속에는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 눈빛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만은 아닐 것이고   내 팔다리에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엄마들이   함께 웃고 울고 하는 것 아닐까    외로워도 외로운 게 아니다   혼자이지만 혼자일 수가 없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읽은 시 2024.09.10

라원이의 대구 첫나들이

태어난 지 1년 반이 된 손녀 라원이가 어제 낮에 난생처음으로 제 부모와 함께 대구에 왔다가 오늘 오후에 남양주로 돌아갔다. 그는 승용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추석 열차표 예매를 놓쳐서 1주일 앞당겨 열차(SRT)를 타고 왔다가 간 것이다.  어제 낮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승용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었다. 불로동의 냉면집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팔공산으로 갔다. 도중에 잠이 든 라원이 고향집인 산가에 도착해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뒤쪽의 계곡으로 내려갔다. 더운 날씨라 물은 차지 않았다. 라원이는 얕은 물에 들어가 손발로 물을 튀기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 개울은 내가 어릴 적엔 여남은 명의 마을 아이들이 여름이 되면 살다시피 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아이 그림자..

텃밭 일기 2024.09.09

박성우의 「매우 중요한 참견」 감상 - 문태준

매우 중요한 참견   박성우 (1971~)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   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 볕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   참견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공연스레 나서서 개입하는 것이다. 호박 줄기가 하필 길의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본 할머니는 넝쿨을 들어서 뻗어갈 방향을 돌려놓는다. 참견하는 일이더라도 참 잘한, 요긴한 참견이라고 하겠다. 이 시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호박 줄기가 기어가는 기세는 ‘성큼성큼’이라고 표현하고, 할머니의 발걸음 속도는 ‘느릿느릿’이라..

해설시 2024.09.01

빌라에 산다 - 안현미

빌라에 산다   안현미(1972~)     극락은 공간이 아니라 순간 속에 있다 죽고 싶었던 적도 살고 싶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꿈을 묘로 몽을 고양이로 번역하면서 산다 침묵하며 산다 숨죽이며 산다 쉼표처럼 감자꽃 옆에서 산다 기차표 옆에서 운동화처럼 산다 착각하면서 산다 올챙이인지 개구리인지 햇갈리며 산다 술은 물이고 시는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산다 물불 안 가리고 자신 있게 살진 못했으나 자신 있게 죽을 자신은 있다고 주장하며 산다 법 없이 산다 겁 없이 산다 숨만 쉬어도 최저 100은 있어야 된다는데 주제넘게도 정규직을 때려치우는 모험을 하며 시대착오를 즐기며 산다 번뇌를 반복하고 번복하며 산다 죽기 위해 산다 그냥 산다 빌라에 산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서 자꾸 어디니이껴 하고 물을까

내가 읽은 시 2024.09.01

관심 - 이영광

관심   이영광     아프지도 않으면서 전화로 휴강시키고   우히히히, 베개를 끌어안고   뒹구는 사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   금방 거짓말이 될 비밀들이   가슴속에 가득한 사람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혼자가 되는 사람   휴대폰과 인터넷과 디스커버리 채널의   정글 너머에   어쩌다 출몰하는 사람   사람이 되란 말이 가장 무서운 사람   사람인 듯 사람인 듯한 사람   나는 이 사람이 이상하다   나는 요즘 오직 이 사람한테 관심이 있다                    —『직선 위에서 떨다』 창비 2003.

내가 읽은 시 2024.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