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물 속의 집 - 이상국

공산(功山) 2017. 1. 25. 13:08

   물 속의 집

   이상국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암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 모래기는 영랑호 주변에 있는 마을 이름.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빙(結氷) - 이상국  (0) 2017.01.25
골목 사람들 - 이상국  (0) 2017.01.25
런던포그 - 강성은  (0) 2017.01.24
내 꿈 속의 벌목공 - 강성은  (0) 2017.01.24
세헤라자데 - 강성은  (0) 2017.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