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이탈 - 이성선

공산(空山) 2020. 1. 6. 17:04

   이탈

   이성선


 

   작은 내 집에 마당에 설악산에 눈이 가득 내리고 세상 분간이 어려운 날, 갇힌 나를 향해 방안 동백나무가 동백꽃만 붉게 피어 주던 날, 뜻밖에 선생의 저서를 받았다. 겨울을 헤매어 눈 맞으며 찾아온 괴물, 다른 것은 다 두절되었는데 그대 어찌 왔는가. 눈을 털고 봉을 뜯자 한기(寒氣)에 깡말라버린 고봉(高峯)의 정신 하나가 갑자기 끈을 풀고 벌떡 일어나 내 무방비의 따귀를 후려친다.

   너 여기서 놀아라. 나갈 생각을 말 것. 번개 속에 귀신 더불어 천둥 벼락 혼과 설악골에 살아라. 그 속에 침묵할 것. 위험 속에 몸을 던질 것. 마지막까지 실패하여 최후에 꽃잎 같은 피노을 한 장 덮고 죽을 것.

   열었던 저서를 닫고 밖을 보니 그 사이 눈은 더 아득히 쌓여 세상 길은 이제 다 지워졌는데 갑자기 문에 날개 부딪는 소리, 나가 보니 큰 새 한 마리 무리를 벗어나 거기 주저앉아 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땅에 없는 길 하나 나를 찾아와 문 앞에서 산 쪽으로 신발을 내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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