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주인공과 들러리 - 반칠환

공산(功山) 2018. 9. 19. 11:37

   주인공과 들러리

   반칠환​​(1964~ )

 

 

   내가 세상에 나오기 46억 년 전에 지구를 만들어놓으셨더군요. 저렇게 많은 별들을 놔두고도 말이죠. 내가 다칠까봐 다섯 번이나 대멸종이라는 대본 수정이 있었더군요. 무서운 공룡들을 귀여운 도마뱀으로 바꾸어 놓았더군요. 내가 맨발로 다닐까봐 수렵채취에서 신석기 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차례차례 진행해 놓았더군요. 내가 가난한 여인의 자궁에서 갓 나왔을 때 따뜻한 아랫목과 형제들을 준비해놓으셨더군요. 붉은 알몸 속에 든 건 두려움과 울음뿐이었는데 말이죠. 내가 낡은 오두막에서 유년을 보낼 적에도 내가 다 가보지 못할 산 너머들을 첩첩이 준비해 두셨더군요. 내가 거니는 것은 겨우 옷 솔기 같은 몇몇 바닷가일 텐데 깊디깊은 심해와 기이한 어족들까지 노닐게 해두셨더군요. 나는 올해 내내 여행한 적이 없는데 지난 봄 꽃들이 북으로 달려가더니 올 가을 단풍이 남으로 내려오는군요. 아아, 내가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형제와 아내와 몇몇 친구들뿐인데 곳곳에 70억이나 살고 있도록 해두셨더군요. 별이 죽은 다음에도 수백억 광년 동안 도달한 빛과,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흙 한 줌 속의 미생물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준비해 두셨더군요. 그런데, 나 또한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준비물 가운데 하나였더군요. 주인공이어서 행복하고, 들러리라서 홀가분하도록 말이죠.

 

 

   ―《딩아돌하2015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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