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수도사
홍일표
바위 속에 오래 노래하지 않은 혀
그러나 지금은
운구하기 어려운 겨울밤
검은 피아노가 있다
한 번도 스스로 몸을 열어보지 못한
봉쇄 수도원
조막만한 발을 달아주었으나
걷지 못한 지 오래
별빛 무성한 스무 살 너머 서른, 마흔, 쉰
강당 구석에서 홀로 늙어가는 수도사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
우는 법도 잊고
노래하는 혀도 사라진
누가 나를 깨다오
부숴다오
귀기울일수록 밝아오는
새벽달 기우는 창가
밤새 늙은 피아노에게 입을 달아주고
말을 걸어준다
바위가 갈라지고
밤이 깨지고
폭풍우와 해일
새들의 지저귐과 아침 햇살 반짝이는 수련
생긋 웃는다
노래의 검은 원석
돌아보니 죽은 하늘을 움켜쥐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온몸 캄캄한 그대
조용히 공중을 빠져나가던 마음이 불붙어 타오른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문학동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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