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입설단비(立雪斷臂) - 김선우

공산(功山) 2017. 7. 10. 12:20

   입설단비(立雪斷臂)

   김선우

 

 

   2(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

   달마에게 도()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

   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

   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

   아름다운 것들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

   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

   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

   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

   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

   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

   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

   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

   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은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

   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

   마다 않고 흰눈을 맞이하여 그득그득 견디어주다가

   드디어는 팔뚝 하나를 잘라들고

   다만 고요히 서 있어 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새의 부리에 손마디 하나쯤 물려주고 싶은 것이다

 

 

   ​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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