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가축의 정신 - 박지웅

공산(功山) 2017. 8. 28. 17:09

   가축의 정신

   박지웅

 

 

   소 팔아 상경한 아비가 소처럼 일하고 돌아온 저녁

   그림자가 뒤로 천천히 길어지더니 무거운 쟁기처럼 땅에 박히었다

   앞장선 아비를 따라 우리는 여물통 같은 한강에 입을 처박았다

   그곳에 모인 소 무리를 둘러보며 아비는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하거라 너는 커서 소가 되면 안 된다

   그 한 마디에 마음이 모였다가

   돌멩이 맞은 듯 퍼져 나가곤 했다

   쓸쓸한 마음이 몸을 부비면 가슴이 시리다는 것을 알았다

   한 입 뜯으면 강은 또 묵묵히 우리 입 앞에 여물을 채워놓았다

   시린 네 개의 무릎을 가슴 안에 끌어넣어 데우던 아비의 밤

   아비는 가축의 정신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으니

   한강의 기적을 일군 소들과 함께 이제쯤 인간의 국경으로 들어갔으리라

   코뚜레를 벗고 어느 전생의 저녁에 대하여 쓰는 밤

   아비가 죽을 때까지 나는 정체를 들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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