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쓸쓸함의 비결 - 박형권

공산(功山) 2017. 7. 23. 22:14

   쓸쓸함의 비결

   박 형 권

 

 

   어제 잠깐 동네를 걷다가

   쓸쓸한 노인이

   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았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사그락 사그락

   눈 내리는 소리로 들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밖과 문 안의 적요寂寥가 소문처럼 만났다

   적요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탱탱하여서 느슨할 뿐

   안과 밖의 소문은 노인과 내가 귀에 익어서 조금 알지만 그 사이에 놓인 경계는

   너무나 광대하여

   그저 문풍지 한 장의 두께라고 할 밖에

   문고리에 잠깐 머물렀던 짧은 소란함으로

   밤은 밤새 눈을 뿌렸다

 

   어제오늘 끊임없이 내리는 눈에 관하여

   나직나직하게 설명하는 저 마을 끝 첫 집의 지붕

 

   나는 이제 기침소리조차 질서 있게 낼만큼

   마을 풍경 속의 한 획이 되었다

   나도 쓸쓸한 노인처럼 아무 뜻 없이 문 여는 비결을

   터득할 때가 되었다

   실은 어제 밤새워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문고리에 손 올리고 싶어서

   나는 문을 열었다

 

 

   ​— 17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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