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공산(空山) 2023. 2. 11. 13:23

   옛날의 그 집

   박경리(1926~2008)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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