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外地)
오정국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지금 내 가슴을 열어 보면
번갯불의 녹슨 칼과
뽕나무 등걸의 검붉은 심장,
표지가 뜯겨 나간 몇 권의 책이 있다
여기서 나는
차갑고 불길한* 불꽃의 책을 읽었다
너무 짧거나 긴 생애들
가당찮은 우연의 목록을 뒤적여 보면
엇갈린 사랑의 기나긴 이별
검은 상처의 블루스**가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떠나지 않는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세월의 철길 아래
회오리치듯 뻗어 가는 담장의 꽃들
철따라 익어 가는 붉은 열매들
이제 내 가슴을 열어 보면
땡볕의 돌멩이와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샤를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글 중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에서 따옴.
**미국 흑인 영가 「Broken Promises」을 번안한 대중가요 제목.
―계간《문학들》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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