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사려니 숲길 - 도종환

공산(空山) 2019. 6. 2. 20:25

   사려니 숲길

   도종환

 

 

   어제도 사막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 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 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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