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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이라는 도서관 - 송경동 삶이라는 도서관 송경동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2022)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4. 29.
  • 무 - 하상욱 무 하상욱(1967~2023) 시골집 텃밭에 쭈그려 앉아 무를 뽑았다 희고 투실투실한 무였다 너희들 나눠 주고도 이걸 다 어떻게 하냐 시장에 나가서라도 팔아 볼거나 어머니는 뜻하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 머릿속을 텅 비게 해 주는 무였다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고 마음은 쉬었다 뽑아낸 자리마다 근심을 묻었다 이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국을 끓이면 얼마나 시원하려나 내 근심 묻은 자리마다 무가 다시 자라날 것을 어머니도 알고 나도 알았다 애초에 어머니도 무였고 나도 무였으니 그러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을 읽는다. 시인은 ‘달나라 청소’라는 상호..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4. 18.
  • 초록 동맹 - 홍일선 초록 동맹   홍일선     세상이 질고로 가득하니   그들은 불임으로 답 주었다   잎새는 무성하였지만   꽃 내놓는 것을 두려워했고   끈달아 열대야가 계속되었고   또 초록별 어디에선 혹한이 일상이었고   세상이 아수라 야수들로 넘칠 때   한 생명은 한 생명을 거부할 수 있는 것    씨앗을 과실을 주지 않겠다는 것은   종족을 퍼트리지 않겠다는 것은   인류세 끝이 가까이 왔다는 선언    미래 세대를 도둑질하지 말라는    그레타 툰베리 소녀의 초록 법설을    그들도 삼가 경청하였던 것   그들은 초록 동맹    강경파 맹원이 된 것이다     ―『초록법설』 시화총림, 2024.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3. 12.
  • 고고杲杲 - 이자규 고고杲杲    ― 유협 『문심조룡』 물색 편에서   이자규     그것은 높고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경이    내 눈을 뺏어간 마당은   이미 태양의 간을 발라 피를 뿜는 중이다   내 시신경을 잡고 요요거리는 마당에 이윽고   간밤의 상처가 안경 벗어놓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꽃병 없이 낱말도 없이 문장이고 물관인 당신,   자욱하다    바람이 거세되고 기진한 밭이랑을 감싼 흙   산비알에서 온 살점들은 옥토의 추상형   석류꽃들 벌고 오이꽃 피고 긴말 전하지 않아도   푸름으로 알아듣는 남새가 있고   빛과 그늘에 죽고 사는 이파리가 낭자하다    다친 마음은 눈이 밝아서 경물의   기와 운으로 음양을 깃들이고 있는   당신   열린 수정체 너머 내 망막으로 버거운 햇발 노 맞고 서서   이 빛..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3. 9.
  • 나는 파란고리문어 - 이자규 나는 파란고리문어   이자규     그랬는데 바닷물이 안방까지 밀려왔는데 새끼문어였다   다 커서 생모 찾아 말없이 떠난 막내의 웃는 얼굴   파도야 뒤집어엎어라 쳐라 때려라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도 온몸이 흥건했던    것처럼   수만 꼬리 탐색의 수컷을 만나 단 한 번의 열렬한 사랑인   아무것도 안 먹고 촉수로 바람을 일으킨 어종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울음보다 강하게 가르친 적을 아는지   마지막 인사인 너    지금은 누가 만지기만 해도 독성이 번지는 살의로 생을 마감하는   파란고리문어의 아픈 blue와 땀나는 波浪 속이다    식후 넘긴 분홍 젤로다 세알이 환각 속 서른 해를 달리고   옹알이처럼 몽실몽실 흰 목덜미를 돌리고 네가 처음 와서   수두로 온 얼굴에 밭죽 뒤집어쓰고 가쁜 숨..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3. 9.
  • 블랙맘바 - 이자규 블랙맘바   이자규     이제 내 탐지에 걸려들지 마라   나는 네게 내 이빨을 다 주었다    어차피 생은 드러내거나 숨기는 것으로 저무는 것   빠진 눈알을 헹궈 다시 넣는 어미를 지켜보며   外耳에 진동이 자라나고 있는 블랙맘바    엄마, 한밤중에 방문하는 저 모자들이 두려워요   내가 태어날 때 너는 나를 읽어주었단다   그러니까 저들 앞에서 줄타기하고 싶은 걸요    어디선가 너의 이복동생을 물어다 내 등에다 업히고   아버지는 좀 더 높은 쪽에서 하반신이 잘려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가 대만원이라서 그래요 희미해지는 걸요   돌멩이 위에 침을 흘리고 다니지 마라   집게를 든 손들은 좋아서 발소리를 죽일 것이다   알아요 이제 기척을 듣고도 이빨을 아끼는 걸요    내 둥지 앞에 매해 젊..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3. 9.
  • 광포리 석화 광포리 석화   이자규     파래 섞은 석화 물회, 하동 광포리 지나   늙을 줄 모르는 달빛만 우수수   노량대첩을 아는 바람이   대교 아래 통통배 왜적 같은 해풍이 거칠다    잘살자는 고속기계문명으로 노쇠해진 닻을 보다   방학 때면 남해군청 앞 할머니 댁으로 갔던 단발머리   노를 저어 건넜던 나룻배도 사라진 지 오래    파도가 센 날은 이쪽 여인숙에서 정유재란을 떠올리며   물별들과 밤을 새웠고   해상봉쇄라는 역사적 기억 속에 들어   한참을 출렁거렸던 바다 울음에 가슴이 아렸다    광포 바닷가에서 따온 석화를 동산처럼 쌓아놓고   하동김을 묶어 냈던 고모는   이젠 녹슨 어구만 닦으며 하는 일이 없다    금오산 허리를 돌아 광양만으로 이어지는 산업차량 행렬이   왜적 풍을 닮았다  ..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3. 9.
  •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뿔』 2002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3. 3.
  • 티끌이 티끌에게 - 김선우 티끌이 티끌에게   -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   김선우 (1970~)     내가 티끌 한 점인 걸 알게 되면   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가 흐르고   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 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   춤추며 떠돌다 서로를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   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는 다정한 접촉,   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2. 28.
  • 무지개 - 이정록 무지개   이정록(1964~)     슬몃 자개농짝을 어루만지는 걸 보니    너도 이제 제법 나이를 먹었는가보다    어미가 저 전복 패한테 배운 게 있다    무엇이든 겉만 보고 가름하지 말거라    누구나 무지개는 가슴 안쪽에 둔단다 공감수 1 댓글수 0 2025. 2. 28.
  • 꽃다지 - 서대선 꽃다지   서대선     눈 내린 새벽    남의 집 살러 가는   열두 살 계집아이   등 뒤로    눈 속에 묻히는   작은 발자국    멀리서 대문 닫아거는 소리     -------------------------------   꽃다지는 오이나 가지 등에 맨 처음으로 열리는 열매를 이르는 말입니다. 요즘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는 입 하나 덜기 위해서 식모살이를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제목인 “꽃다지”에 암시되어 있듯이 주로 맏딸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시인은 구구절절 긴 설명을 하는 대신 행간의 여백을 사용해 “눈 내린 새벽” 길로 상징되는 차갑고 어두운 세상으로 나가는 “열두 살” 어린 소녀와 “대문 닫아거는 소리”로 상징되는 부모와의 단절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2. 8.
  • 어두운 등불 아래서 - 오세영 어두운 등불 아래서   오세영(1942~)     한 겨울 밤   정갈한 백지 한 장을 앞에 두고 홀로   네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자   터벅터벅 사막을 건너던 낙타의 고삐 줄이   한 순간 뚝 끊어져버리듯   밤바다를 건너던 돛대의 키가 불현듯 꺾여지듯   무심결에   툭,   부러지는 연필심.   그 몽당연필 하나를 들고   흔들리는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내 마음 막막하여라.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2. 7.
  • 소가 혀로 풀을 감아올릴 때 - 강영란 소가 혀로 풀을 감아올릴 때   강영란 ​   수굿하게 고개 숙이고   상냥한   콧김   입김   땅에게 바싹 절하고   조심조심 혀로 풀을 감아올린다   뜯어먹어 미안하고   상처 냈으니 미안해서   침을 한번 쓰윽 묻혀준다   때로 몸의 상처는 침도 약이 되어서   온 들판에 풀들이 새로 돋아난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1. 12.
  •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 최정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최정례(1955~2021)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을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 공감수 0 댓글수 0 2025. 1. 6.
  • 마지막 지상에서 - 김현승 마지막 지상에서   김현승(1913~1975)     산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해진 지평선을 넘어간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현대문학》 1975. 2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2. 30.
  •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 이화영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   이화영 ​   엄마는 약을 드시고 계속 잠만 잤다   가끔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악몽을 꾸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작나무 뼈처럼 창백한 몸에   하루에도 옷을 몇 차례 갈아입히고​    고집스럽게 기저귀를 거부해서   바지를 내리는 순간 지린 꽃 피었다    목욕을 시키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투에   완전 복장을 입혔다​    시공간을 잊고   사람을 잊고   자신의 정체성까지 잊고   광야에서 홀로 마주한 세상 끝의 얼굴​    엄마에게 출구 전략이 있을까   어느 문을 나서고 있는지   비 내리고 춥다​    낡은 문갑 위에   이름 모를 분홍 조화   말 없는 꽃은 이쁘다​    한 방에 이불을 펴고 눕는다   이불을..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2. 21.
  • 오늘밤은 리스본 - 김영찬 오늘밤은 리스본   김영찬     하지만 오늘밤엔 리스본까지만    바르셀로나, 쌩 폴 드방스쯤이야 나중에 품어도 전혀    늦지 않지    북방의 주택가엔 주인 없는 개들만 어슬렁어슬렁   빠리의 쌩 제르맹 뒷골목에 나뒹구는 빈 포도주병들만   습관적인 휘파람 소리를 내더라도   오늘은 오직 리스본까지만,    몰도바   몰디브   몰라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렇더라도 결국   품 안에 끌어들여 일일이 쓰다듬게 될 무국적의 섬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야 없지    초저녁부터 야심한 밤까지 리스본의 불 꺼진 테라스에 기대어   고즈넉한 밤안개에 끈금없는   칵테일 여행   진한 압생트 쑥 향에 코를 처박고   뜨거운 섬이 하나하나 가슴 복판에 솟구칠 때까지   집에 갈 생각   배낭 메고 딴 길로 .. 공감수 4 댓글수 3 2024. 12. 15.
  • 대설 - 김영삼 대설   김영삼 (1959~)     소나무우산살이 부러졌다   전봇대로 나앉아 잔뜩 움츠린 직박구리가 오석 같다   목동처럼 저녁이 와서 흩어진 어둠을 불러 모으는데   감나무 가지에 간신히 몸을 얹은 박새 고갯짓이 조급하다   굴뚝새는 물수제비뜨듯 집집으로 가물가물 멀어져 가고    포롱, 포롱, 포롱…   참새, 멧새, 딱새, 곤줄배기도 부산하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2. 15.
  • 먼 강물의 편지 - 박남준 먼 강물의 편지 박남준(1957~ )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2. 8.
  • 일요일이다 - 장옥관 일요일이다   장옥관     다시 일요일이다   태양은 여느 태양과 다르지 않다    어제 그 자리 그 시간에 조금 옆쪽으로 비켜 앉았다   직접 보진 못하고 감은 눈으로만 보았다    어젯밤엔 초나흘 달을 보았다   눈 아래 찢어진 흉터 같았다   그제 밤에 본 것보다 좀더 벌어져 있었다    파밭의 파가 조금 더 솟고   자두나무 가지가 조금 더 처진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늙었다    그젠 삼십 년 입은 바지를 버렸다   옷을 버리는 일은 슬프다   버리고 버림받는 일은 유정(有情)한 일이다    다시 일요일이라서 슬프다   하루하루를 버린다   어제보다 우주가 조금 더 옮겨 앉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2022.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1. 10.
  • 뒤척이다 - 천양희 뒤척이다   천양희(1942~ )     뒤척이다   허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거미처럼   쓰러진 고목 위에 앉아   지저귀는 붉은가슴울새처럼   울부짖음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울음원숭이처럼   바람 불 때마다 으악   소리를 내는 으악새처럼   불에 타면서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처럼    남은 할 말이 있기라도 한 듯   나는 평생을   천천히 서둘렀다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0. 30.
  • 도착 - 문정희 도착   문정희 (1947~)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0. 11.
  • 지금 오는 이 이별은 - 박규리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박규리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마르게 내려앉는 사랑이다 이 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 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이 환장할 봄날에』 2004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0. 9.
  • 무운시 - 기혁 무운시(Blank Verse)   기혁     말기의 암환자는   자신의 병이 운이라고 했다.   아이를 업은 아내도, 수차례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도   운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운과 위장운   그리고 얼마간의   간운.    오장육부에 퍼진 운들이 깨어날수록   운명도 이름을 달리했지만,   때로는 운명의 이름들 사이에   낭만이라는 뜻이 섞이기도 했을 것이다.    두운과   요운과   각운을 맞춰온 일생처럼,   온몸의 운율로 써내려간   정형의 행간.    죽음은 어떤 염문에도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 했다.    능숙한 수사로 상처를 꿰맨 자리에   무의식 깊은 곳까지 방사선을 쬐어야 했던 비문이   완치되지 않는 은유로 전이된다.    환영은 정말 블랭크에만 숨어드는 것일까?  .. 공감수 1 댓글수 0 2024. 10. 4.
  • 히말라야 해국 - 김명기 히말라야 해국(海菊)   김명기 (1969~)     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   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   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   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    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   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   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    몹쓸 산기슭이나 대물림한 병든   아비가 술잔에 눈물을 부딪칠 때   가파른 계곡을 겨우 올라가는 어린 눈망울과   몇 번이나 기워 신은 해진 샌들 사이    갈라진 뒤꿈치가 딛고 가는 발자국처럼   그늘진 비탈에서 비탈로 해국이 번지..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10. 2.
  • 주소 - 박소란 주소   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심장에 가까운 말』 2015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9. 29.
  • 하여간, 어디에선가 - 박승민 하여간, 어디에선가   박승민 (1964~)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   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   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9. 29.
  • 외출 - 김영태 외출   김영태(1936~2007)     꽃을 사야지   별을 판다면 별도 사야지   금관 담배도 한 갑 사야지   속초항 며루치도 흉년인데   진주 妓生 버선 속   맨발에 윤기가 없다면   외상으로 연탄 백덩이도 사야지   꽃 사는 마음으로   면도칼도 사야지   그럴수록 정장하고   세파를 헤쳐 나가야지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9. 26.
  • 설경 - 김영태 설경(雪景)   김영태     우리 눈 높이 위에 있는 음악이다   바람이 멎은 후   꽃나무 사이 풍경처럼 삭막한 음악이다   표정만한 가벼운 몸 둘레에 따스한 얼굴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소망하는 얼굴이다   우리 시야보다 먼데 있는 종소리다   귀를 막고 숨어도 들려오는 종소리다   하여,   이후에 찾아올 몇몇 친구   이미 묘비에 잠든 이   사랑하는 이   모두 한결같이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여   얼굴의 미소여   저 제야의 종소리는 무슨 연유일까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유언은 공감수 0 댓글수 0 2024. 9. 26.
  • 탑동 - 현택훈 탑동 현택훈(1974~ )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 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 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 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 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 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 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 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 자전거 바퀴에 묻어 방파제 끝까지 달리면 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 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 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 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 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 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 공감수 1 댓글수 0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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