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고고杲杲 - 이자규

공산(功山) 2025. 3. 9. 11:10

   고고杲杲

    ― 유협 『문심조룡』 물색 편에서

   이자규

 

 

   그것은 높고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경이

 

   내 눈을 뺏어간 마당은

   이미 태양의 간을 발라 피를 뿜는 중이다

   내 시신경을 잡고 요요거리는 마당에 이윽고

   간밤의 상처가 안경 벗어놓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꽃병 없이 낱말도 없이 문장이고 물관인 당신,

   자욱하다

 

   바람이 거세되고 기진한 밭이랑을 감싼 흙

   산비알에서 온 살점들은 옥토의 추상형

   석류꽃들 벌고 오이꽃 피고 긴말 전하지 않아도

   푸름으로 알아듣는 남새가 있고

   빛과 그늘에 죽고 사는 이파리가 낭자하다

 

   다친 마음은 눈이 밝아서 경물의

   기와 운으로 음양을 깃들이고 있는

   당신

   열린 수정체 너머 내 망막으로 버거운 햇발 노 맞고 서서

   이 빛의 가무, 흥건하다

 

   미망 속 영세한 내 문장에 남세스러움만 내려다보고 있을

   무위의 당신 가득한 물색

 

 

   ―『붉은 절규』 시산맥사 202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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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광포리 지나/ 늙을 줄 모르는 달빛”과 함께 “물별들과 밤을 새”우기도 하고(「광포리 석화」), “그랬는데 바닷물이 안방까지 밀려”올 때 함께 딸려온 “새끼문어”(「나는 파란고리문어」)를 키워 보내기도 했으며, 이제는 “얘야, 네가 다 자랐으니 나는 이 둥지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진술하는(「블랙맘바」), 이자규 시인의 그 치열하고 절절한 삶의 경지에서 우러나온 시집 『붉은 절규』 출간을 나는 “높고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경이”로운(「고고」) 저 시구詩句들을 빌려 축하드리고 싶다.

   (김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