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정어리고래 - 하수현
쇠정어리고래
하수현(본명 하성훈)
바람 떼가 시장통까지 따라 들어와
쇠정어리고래 주위를 맴돈다
생고등어 뱃속에 왕소금을 던지던 한 아낙은 바람결에 움찔하다가
고래 쪽으로 눈길을 단단히 꽂았고,
행인들도 언 발을 머리에다 이고는 모두 입을 닫는다
어쩌다 운명의 그물 안으로 뛰어든 고래가
시장 바닥에 드러누우면
흡사 집 한 채 통째로 자빠지기라도 한 듯
무조건 시장통 빅뉴스가 된다
쇠정어리고래의 허연 배에 어설픈 현관문 하나
뚝딱 만들어지고부터
창자 허파 태평양의 물결이 토막토막 잘려 나오고
뒤이어 나온 살덩이들은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생애를 통곡한다
고래 창자에도 작은 창문을 내고 나니
소화가 집행유예된 오징어들,
종(種)을 모를 만큼 절반쯤 무너진 물고기들,
한때 콜라가 주인이었던 붉은 페트병도 나온다
붉은 페트병은
그간의 암흑기를 털어내고 부활의 나라로 가리라 나는 믿는다
그다음으로는 포유류를 향한 알 수 없는 동정심도 도려내고
인도양 대서양의 수심(水深)을 후려치는
고래 떼의 장엄한 유영(遊泳)마저 뜯어낸다
비운의 쇠정어리고래는 잘린 살덩이들이 개별적으로 울었을 뿐
몸통이 절반이나 해체될 때까지
이 초유의 현실을 외면하느라 줄곧 눈을 감고 있다
어시장 바로 뒤편, 파란 바닷물 쪽을 보면
육신이 갈기갈기 찢긴 쇠정어리고래의 진혼을 위해
겨울바다를 비장(批狀)으로 달려온 고래 떼들이
상기된 낯으로 수런거릴 터인데,
울컥거리던 저녁바람도 이젠 날을 세운다.
― 제18회 수주문학상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