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겨울에서 봄으로 - 황동규

공산(功山) 2016. 5. 18. 22:50

   겨울에서 봄으로

   황동규

 

 

   겨울 편지

 

   어제 오후 큰눈이 내려

   포구의 길이 모두 지워졌습니다.

   새벽녘에는 뒷산 눈이 몰래 마을로 내려와

   담장을 부숴 길을 내기도 했습니다.

   짧은 방파제 안에 배 몇 척 모여 떨고 있을 뿐

   앞 언덕의 전나무도 소나무도 오리나무도

   다 숨어버렸습니다.

   당신도 삶의 흰색 속에 숨곤 했지요.

   동서남북이 온통 흰빛일 때

   국도를 달리던 승용차 하나가

   눈에 밀려 포구로 들어와 감히 바다에 뛰어들진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축대 위에 정지했습니다.

   갑자기 따악 소리가 나고

   흰 눈 속에서 소나무 하나가 거짓말처럼 나타나

   기괴한 몸짓으로 자신의

   눈 뒤집어쓴 팔 하나를 부러뜨렸습니다.

 

 

      봄 편지

 

   살과 친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고

   오늘은 머리 위가 온통 다른 색깔입니다.

   남보라에 따뜻이 베이지를 푼 하늘이

   수평선까지 넘실대고 있습니다.

   아낙들이 건지는 해초들도

   가만히 못 있고 몸들을 뒤척이고

   방파제를 나서는 통통배도

   가볍게 둥싯거리는 품이

   허리춤이 되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과장은 삼가겠습니다.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고기들이 한눈 팔며 나다니는 바다를 끼고

   혼자 방파제를 마음놓고 왔다갔다하겠습니다.

 

 

      되돌아온 편지

 

   고장난 부표(浮漂) 등대를 끌고

   통통배가 헤엄쳐 들어왔습니다.

   버스가 들어왔다 나가며

   마을을 온통 흙탕칠해놓았습니다.

   버스편에 당신 편지가 떨구어졌군요.

   건성으로 읽고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건성으로 읽었습니다.

   이제 아주 숨으시겠다고요?

   혹 성공하신다면

   내 마음 속 어디엔가 숨으시지 않겠어요?

   주막 밖으로 나가니 어둠 속에서

   그물 널린 방파제에 배가 살짝 살짝

   그러나 잘못 부딪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안 부친 편지

 

   새벽 뜰을 쓸다 보니

   참새 한 마리가 얼어 죽었군요.

   그처럼 가벼울 수 없었습니다.

   입다물고 눈 꼭 감고

   두 발 오므리고

   가볍게 잠든 것 같았습니다.

   마당 한켠에서는 대들이 파랗게 얼어

   바람도 없이 한참 떨었습니다.

 

 

      다시 봄 편지

 

   쌓아놓고 읽지 못한 책도 많겠지만

   오래 소리없던 대숲에 새들이 드나드는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봄은 좀 많습니까?

   X레이 찍을 때만 가슴 펴본 봄은 또 얼마겠습니까?

   진단카드 들고 공연히 마음죄인 봄은?

   가슴 못 편 사람끼리 모아 찍을 때

   당신과 내가 나란히 X레이 필름 속에 나타난다면?

 

   새들이 날읍니다.

   한 새가 이상한 몸짓 하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땅 위에선 새 한 마리가

   고개 갸웃대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이 젖어 있군요.

 

   오랜만에 삽을 들고

   옆집 청년이 돈사(豚舍) 자리잡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한참 파던 그의 괭이에 무슨 흰 것이 닿았습니다.

   반듯이 누운 사람의 뼈군요.

   가슴 언저리가 가장 복잡했습니다.

 

 

   ― 『황동규 시전집2』 문학과지성사, 1998.

   ― 『몰운대행』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