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독 - 허만하

공산(功山) 2016. 2. 16. 17:43

   독

   허만하

 

 

   입술과 입술이 만드는 캄캄한 운하

   그 은밀한 물길을 따라

   미량의 독을 지닌 액체가

   돛배처럼 왕래한다

   바람에 헐떡이는 겨울나무 가지 끝 숨소리에

   동란의 해 여름바다의 눈부신 갯내가 묻어 있다

   알몸은 말이 되기 이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벙어리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한 시대의 종말처럼 몸부림쳤다

   극약을 가슴에 품고

   피난 도시에서 우리는

   헤매는 쓸쓸한 암호에 불과했다

   광복동에서 본 한 송이 글라디올러스에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낀 시인

   Rien, Rien.

   이국의 수도에서 이승을 하직한

   한 시인이

   마지막으로 잡은 것은

   가슴 위에서 잡은 자기의 다른 켠 손에 불과했다.

   붕대로 묶인 두 손으로 안고 있었던

   『독』이란 미간시집의 제목.

   Rien, R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