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두 뼘 - 천수호
공산(功山)
2021. 2. 24. 20:19
두 뼘
천수호 (1964~ )
그때 당신은 키가 컸다
나를 감싸고도 두 뼘이 남았다
바람이 그 두 뼘에만 고였다가 흘러갔다
나는 바람 맞을 준비도 하지 않았다
두 뼘의 여유로 고개를 수그리지도 않았다
두 뼘은 빈 웅덩이처럼 채울 것이 많아서
당신이 사준 화장품도 올려놓고
당신이 부어주던 핏빛 와인도 얹어놓고
이쁘다, 잘한다는 기분좋은 형용사들도 늘어놓고
당신이 심어준 넝쿨장미도 기대놓고
가끔 내밀어준 시의 말도 걸어놓고
앞 머리칼 날리며 불러준 사랑의 노래도 풀어놓았다
너무 기대어서 두 뼘만큼 틈이 벌어졌다
나와 당신의 두 뼘 키
바람은 그 속에서 만들어졌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