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덕송(牛德頌)'의 구절을 떠올리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하였으나, 대개는 속마음은 외모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도 쥐를 보고 후덕스럽다고 생각은 아니 할 것이요, 할미새를 보고 진중하다고는 생각지 아니 할 것이요, 돼지를 소담한 친구라고는 아니할 것이다. 토끼를 보면 방정맞아 보이지만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는 아무리 해도 아니 보이고, 수탉을 보면 걸걸은 해 보이지마는 지혜롭게는 아니 보이며, 뱀은 그림만 보아도 간특--독살스러워 구약 작자의 저주를 받은 것이 과연이다-- 해 보이고, 개는 얼른 보기에 험상스럽지마는 간교한 모양은 조금도 없다. 그는 충직하게 생겼다.
말은 깨끗하고 날래지마는 좀 믿음성이 적고, 당나귀 노새는 아무리 보아도 경망꾸러기다. 족제비가 살랑살랑 지나갈 때엔 아무라도 그 요망스러움을 느낄 것이요, 두꺼비가 입을 넙적넙적하며 쭈그리고 앉은 것을 보면 아무가 보아도 능청스럽다. 이 모양으로 우리는 동물의 외모를 보면 대개 그의 성질을 짐작한다. 벼룩의 얄미움이나 모기의 도섭스럼이나 다 그의 외모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에 읽었던 춘원의 수필 '우덕송'의 일부다. 춘원은 이렇게 쓰면서 소의 성품을 극찬하지만, 나는 이 수필에 나오는 쥐, 할미새, 돼지, 수탉, 뱀, 개, 당나귀, 노새, 족제비, 두꺼비 등의 짐승들을 특별히 미워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똑같이 사랑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다양한 개성이 이 푸른 별에서의 삶을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해준다는 생각이었다. 족제비가 요망스럽다고 하지만, 설원에서 새하얀 보호색의 털옷을 갈아입고 자기만의 생활공간을 들락거리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습에 이끌려 이 블로그의 이름도 '북방족제비의 꿈'이라고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갑자기 춘원의 저 구절을 내가 떠올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요즘 갑자기 불거진 한-일간의 외교적 경제적 마찰 때문이다(마찰이 아니라 이것은 전쟁이다). 한국 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빌미로 일본 정부가 적반하장 격으로 취하고 있는 수출규제 조치라는 보복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비열한 행태들이 외모에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어를 모르지만 TV 화면에서 총리라는 아베, 외무상이라는 고노, 이런 작자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리고 그 앙칼진 목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무례하고 부덕하고 표독한 성질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뿐만 아니라 독도나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끈질기게 자행해 온 왜곡과 은폐, 억지 주장에서 나는 그들의 본성을 간파해 왔다. 사극에서나 보던 그들의 야만과 간악성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이다. 저런 족속들을 이웃에 두고 있는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불행한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일본과 아베 정권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일본상품 불매운동, 배송 거부, 일본관광 취소 등등. 나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분노에 찬 행동에 동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력이 더 튼튼해져서 저들이 함부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될 때까지 오늘의 이 분노를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