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숨은 신 - 한영수

공산(空山) 2020. 10. 25. 15:41

   숨은 신

   한영수

   흰 낙타는 속눈썹도 흰색이었다 원 달라, 원 달라, 쉰 목소리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바람이 올 때마다 사막의 마른 빵 냄새를 풍겼다 바싹 마른 다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견디고 있었다 앞무릎을 꿇고 언제라도 뒷무릎마저 굽힐 자세였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이 한 번 앉아보고 내리는 낙타의 잔등은 비어서 외따로 높았다 한 무리 관광객이 빠져나갔다 살구꽃이 풀리고 있었다 하얗게 어둑발이 내렸다 저녁기도 시간이 왔다 무엇일까요, 무엇일까요, 집게손가락을 제 귓구멍에 넣고 묻고 있었다 마지막 장이 찢어진 경전처럼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했다 낙타의 눈동자에 물기가 돌았다 흰 빛이 된 말이 길고 가는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모든시, 2017년 겨울호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습관 - 한영수  (0) 2020.10.25
꽃의 좌표 - 한영수  (0) 2020.10.25
나무 - 고진하  (0) 2020.10.21
흰 스프레이 - 김기택  (0) 2020.10.21
저울 - 오세영  (0) 2020.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