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갈리폴리 1 - 마종기

공산(空山) 2020. 10. 5. 08:34

   갈리폴리 1

   마종기

 

 

   에게 해안을 멀리 내려다보는 푸른 언덕, 터키의 남쪽 양지에 묻힌 스무 명 남짓 뉴질랜드 군인들의 무덤이 빛바랜 비석을 부끄러워하며 백 년 이상 졸고 있다. 지나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낮, 나이 든 비석들 가끔 눈 뜨고 깨어나 주위를 돌아본다. 여기가 어디지? 떠나온 내 나라는 어느 쪽이지? 식구들을 떠나 몇 주일씩 배 타고 와서 이쪽은 내 편, 저쪽은 적군이라며 피 터지게 싸웠다. 왜 서로 죽이며 싸워야만 했을까? 시체가 되어 갈리폴리에 상륙했던 병사들의 의문은 매해 향기도 없는 민들레로 피어났다.

 

   땅으로 몸을 받아준 터키는 물론, 조국도 이들을 다 잊은 모양인데 올해도 민들레는 지천으로 피어 먼지 쌓인 향수를 달래주고 있다. 50만 명의 사상자가 난 지옥의 갈리폴리 지방도 한참 지난, 이즈미르 언덕 쪽에 묻힌 이국 병사들이 무슨 흔적을 남길 수 있으랴. 변명도 없이 칼에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고 포탄에 터져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다음 날 아침 묘지에 다시 가서 이름 겨우 보이는 작은 비석을 쓰다듬으니, 손바닥에 비석의 눈물이 흥건히 묻어난다. 그 비석이 내게 기대면서 속삭인다. 그 말이 젖어서 힘이 없다.

 

   내가 자란 목장에는 양들이 많았다. 어머니도 아내도 하늘도 땅도, 아는 것은 양치기밖에 없었다. 나라가 가라고 해서 어딘지 모르고 집을 떠났고 지옥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죽어서야 드디어 전쟁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작 죽어야 할 것은 전쟁이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자를 조심해라. 사상이나 정의만을 외치는 자의 속셈을 조심해라. 그 긴 전쟁이 끝나고 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몸이 아프다. 어머니도 아내도 보고 싶어 억울하다. 저쪽 해바라기 한 무더기까지 대낮부터 고개를 푹 숙인 채 해를 외면한다.

 

 

  『천사의 탄식 202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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